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춘추시대 (문단 편집) == 전투 양상 == 이때까지만 해도 어느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싸운다는 개념은 없었고[* [[가문]]과 혈통의 보존을 중요시하며 [[천명]]과 선조를 중히 여겨 패한 제후의 일가를 멸족시키는 것을 금기시했고, 가문 계승을 위해 자타 안 가리고 몰락한 가문이나 유랑하는 귀족을 데려다 가독을 계승하게 하기도 했다. 오히려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인 제환공은 망할 뻔한 나라를 몇 개씩이나 구해주어 칭송을 들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국가의 멸망은 주로 장강 이남의 국가들에서 많이 일어났다. 물론 장강 이북이라고 멸망전이 없던건 아니었지만...] 국가 연합단위의 전투에서도 대량의 [[보병]]으로 죽고 죽이는 형식의 전투가 아닌, [[전차(고대 무기)|전차]]를 이용한 전차전의 형태였다. 주력이 전차였으므로 전차의 수가 곧 그 나라의 전력을 의미했다. 천자를 뜻하는 만승지국, 제후를 뜻하는 천승지국 등의 단어는 병거(兵車) 만개를 동원할 수 있는 나라, 천개를 동원할 수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승(乘)은 병거를 세는 단위이다. 값비싼 [[말]]과 마부를 데리고 전차를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지배층인 [[왕]], [[제후]], [[경]], [[대부]], [[士|사]]밖에 없었고 따라서 전투의 규모도 작을 수밖에 없었다. 전투는 반나절 정도의 단판 싸움으로 승패가 갈렸다. 북방의 패주와 남방의 패주가 정면으로 붙은 [[성복 전투]]나 [[필 전투]] 같은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전차가 주력이었으므로 기습, 매복은 힘들었으며[*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효산 전투가 그 예.] 양군이 평지에서 만나 싸울 날짜를 잡고 싸우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한 전쟁의 양상은 행정체계의 발전과 국가 단위의 변법으로 이전까지 세금만 내던 야인(野人)들을 국가의 행정 내로 끌어들이고 보병 위주의 물량전, 장기전으로 변화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