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축구굴기 (문단 편집) == 중국 축구의 역사와 프로젝트 추진 이유 == 중국은 국민당 정부가 집권하던 [[중화민국]] 시절부터 축구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이후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직후 어수선한 국내 사정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축구 국가대표팀을 육성하였는데, [[1952 헬싱키 올림픽|1952년 헬싱키 올림픽]] 당시에 중국은 탁구, 육상 등 대부분의 종목에 선수를 내지 않았지만, 남자 축구대표, 남자 농구대표, 수영 선수 우촨위 등 개인과 단체전을 통틀어 단 3개 개인/팀 만 출전시켰을 정도로 축구는 당시 중국 정부가 대표적으로 키우던 메인 스포츠였다. 중국 정부는 1954년 당시 최고의 축구 선진국이었던 [[헝가리]][*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은 1950년부터 1954년까지 30여경기 무패, 1956년까지 6년간 단 1패만 기록한 당대 최강의 축구팀이었다. 그런데 그 1패가 하필이면 월드컵 결승전이었다.]에 축구 국가대표팀 29명 전원을 2년 간 유학시키고 헝가리 축구 레전드를 외국인 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임하는 등 축구에 전폭적인 투자를 했으나 유럽 팀과 치르는 평가전마다 대패를 거듭했고, 특히 1957년 월드컵 지역 예선 1차전에서 [[인도네시아]]에 패배하여 조기 탈락하며 중국 전역이 충격에 휩싸이자 이내 축구에 대한 당의 열의는 차갑게 식고 말았다. 월드컵 예선 탈락 직후 중국은 대만 인정 문제를 놓고 FIFA에 보이콧을 선언하며 월드컵과 올림픽 출전을 거부하였고, [[문화대혁명]]으로 1967년부터 3년여 동안 중국 국내 축구 리그가 중단되기도 했다. 1971년 [[마오쩌둥]]이 올림픽을 제패하라는 교시를 내린 후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육성이 재개되었지만 이후에도 중국 축구 대표팀은 여전히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마오쩌둥이 죽고 1978년 [[덩샤오핑]]이 집권하였는데, 살아 생전의 소원이 중국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걸 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축구광이었던 [[덩샤오핑]]은 중국 축구 육성에 지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유학 시절 식비를 아껴가며 축구를 관람하곤 했던 덩샤오핑은 부총리 시절인 1964년 5월 브라질 마두레이라팀을 중국으로 초청하여 중국 국가대표팀 및 북경팀과 경기를 주선하였는데, 이는 공식적으로 프로 스포츠를 부정해오던 중국에서 최초로 해외 프로팀이 경기를 가진 사례로 기록되었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하여 10년 간 고초를 겪었지만 1977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 재기에 성공하고 이듬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본격적인 축구 육성 정책을 펼쳤다. 덩샤오핑은 집권 직후 CCTV 책임자에게 지시하여 당시 열리고 있던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 월드컵]]을 중국에 생중계하도록 했다. 중국은 대만 문제로 FIFA를 탈퇴, 보이콧했기 때문에 월드컵은 중국 국내에서 금기시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CCTV는 월드컵 중계권이 없었지만 덩샤오핑의 지시로 위성 중계되던 월드컵 중계를 불법 송신, 방송했다. 이어 덩샤오핑은 당시 대만 문제로 마찰을 빚으며 보이콧해오고 있던 FIFA에 1979년 재가입했다. 덩샤오핑은 축구 대표팀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국내 축구 리그부터 성장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고, 1980년 중국 국내 축구 리그를 사실상 프로 리그로 전환하여 현재의 [[중국 슈퍼 리그]]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갑A리그를 출범시켰다. 이어 2부리그 격인 갑B리그도 출범시켰다. 덩샤오핑은 선수 뿐만 아니라 축구 심판 육성을 위해 인재들을 [[독일]]에 유학시킬 것을 지시하는 등 자국의 축구 발전을 위해 세심한 곳까지 신경을 썼다. 덩샤오핑이 이처럼 축구 육성에 매진했던 것은 본인이 축구광이었던 것 뿐 아니라 축구가 좋은 성적을 내면 중국인들의 마음을 결집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정치적인 복안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 대표팀의 성적은 시원치 않았다. 1978년 중국 국가대표팀은 12월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성사된 최초의 축구 한중전에서 0-1로 패하며 [[공한증]]의 첫발을 내딛었고, 3주 후에 필리핀에서 다시 한국과 [[아시안컵]] 예선으로 맞붙었으나 또다시 0-1로 패하면서 패배 의식이 누적되었다. 중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 소원이었던 덩샤오핑은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1982 스페인 월드컵]] 예선을 위해 노력을 다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관계자들은 온갖 신경을 곤두세웠다. 1981년 열린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서 중국은 [[홍콩]], [[마카오]], [[북한]],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를 꺾으며 중국인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지만 결국 [[뉴질랜드]]에게 패해 월드컵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중국 축구 역사상 2002 월드컵을 제외하면 본선 진출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이었다. [[1984 AFC 아시안컵 싱가포르|1984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하면서 다음 월드컵 진출에 어느때보다 희망적이었다. 이후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1986 멕시코 월드컵]] 1차 지역예선에서 홍콩, 마카오, 브루나이와 한조가 되었다. 당시는 1위만이 2차예선 통과였지만 모두 중국에 비하면 한수아래였기에 무난한 1위가 예상되었건만 마지막 경기에서 홍콩에게 패배하면서 1라운드에 탈락하는 대참사를 겪었다.(자세한 내용은 [[5.19 사건]]) 이후에도 중국 축구는 많은 좌절을 겪었다. 하지만 1987년 덩샤오핑의 축구 지원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1988 서울 올림픽|서울 올림픽]] 예선을 통과하여 본선 진출권을 획득한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환호했고 그만큼 서울 올림픽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하지만 올림픽 본선에서 중국은 무득점의 치욕을 맛보아야 했다. 1993년 [[장쩌민]]이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여전히 배후에 덩샤오핑이 건재한 상황에서 중국은 [[J리그]]를 모델로 하여 준프로 리그였던 자국 리그를 완전한 프로 리그로 개편하여 '중국 갑급 A리그'(1부 리그), '중국 갑급 B리그'(2부 리그)를 출범시켰다. 또 1993년부터 리진위 등 어린 선수들을 [[브라질]]로 유학 보내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살아 생전에 소원이 중국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걸 보는 것이었으나 그가 1997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 소원은 이뤄지지 못했으며, 덩샤오핑 사후 다음 해인 1998년에도 중국은 지역예선에서 광탈했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 본 것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한일 월드컵]]이 유일하며[* 이는 당시 개최국 자격으로 본선에 직행한 [[대한민국]]과 [[일본]]이 지역예선에 불참한 덕분에 가능했다.] 그나마도 본선 조별리그에서 [[코스타리카]]에게 0-2, [[브라질]]에게 0-4, [[터키]]에게 0-3으로 탈탈 털렸다. 그 때는 첫 출전이니 경험이다 생각하자는 식으로 넘어갔지만 그 이후에는 이 때보다도 못하는 수준으로 후퇴해버렸다. 중국 역대 지도자 중에는 자타공인 축구광들이 많았다. 일명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덩샤오핑을 비롯하여, 시진핑 역시 중국이 월드컵에 나가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이 자신의 3가지 소원이라 할 만큼 축구에 열정적으로 빠져 있다. 독재국가의 특성상 최고 지도자가 [[까라면 까|까라면 까는 게]] 아랫사람들 하는 일이니 이러한 것도 한 가지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로도 중국은 2006년, 2010년, 2014년, 2018년, 2022년 5개 대회 연속으로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마저도 2014년까지는 최종예선도 못 가고 탈락했다. 게다가 순위가 밀린 상대가 [[호주]]와 [[이란]]은 그렇다 쳐도 [[요르단]], [[카타르]] 같이 중동에서 상위권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팀들이었다. 2006년 2차 예선에서 [[홍콩]]과 [[말레이시아]]를 이겼지만 [[쿠웨이트]]와 1승 1패를 주고받았으나 골득실로 밀려 탈락했고, 2010년 3차 예선에선 [[호주]], [[이라크]], [[카타르]]와 맞붙어서 조 꼴찌로 광탈, 2014년 3차 예선은 [[싱가포르]]만 이기고 [[카타르]]와 [[요르단]]에게 밀려 3위로 탈락했다. 그나마 엄청난 투자와 [[마르첼로 리피]] 감독을 영입해 2018년 월드컵에서는 최종예선에 올랐으나 이마저도 2차예선에서 [[카타르]]에게 패해 2위로 겨우 올라오고 [[홍콩 쇼크|홍콩에게도 고전하며]] 올라왔기에 중국에서도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그나마 최종예선에선 [[카타르]]를 꼴지로 밀어내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을 꺾는 등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했다. 2004년 아시안컵 준우승 이후로는 두 차례에 걸쳐 예선탈락했으며 실력이 많이 상향된 2010년대에도 전통의 AFC 5강(한국, 일본, 이란, 호주, 사우디) 상대로는 한 수 접어야 하며 심지어 이 5강보다 크게 밀리는 [[요르단]], [[카타르]], [[쿠웨이트]], [[시리아]], [[우즈베키스탄]] 같은 국가들을 상대로 원정 경기에서는 고전하고 패배하기 일쑤다. 그나마 선전했다는 것이 2015, 2019 아시안컵에서의 8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