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축구/역사 (문단 편집) === 축구의 탄생 === FA가 결성되기 이전의 영국 [[풋볼]]은 지역별로 제각각 다른 규칙으로 경기하고 있었다. 184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이튼 칼리지, 해로우 스쿨, 럭비 스쿨, 윈체스터 및 슈루즈베리 스쿨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https://en.wikipedia.org/wiki/Cambridge_rules|케임브리지 규칙]]이 작성되어졌다. 하지만 이 규칙은 널리 채택되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1850년대에 많은 클럽들이 학교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거나 대학교들은 다양한 형태의 풋볼을 하는 영어권 국가들을 통해 형성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케임브리지 규칙은 협회 축구(Association football)를 포함한 후속 풋볼 코드들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참고로 케임브리지 규칙이 제정되기 3년 전인 '''1845년'''에는 럭비 스쿨의 세 학생에 의해 럭비 풋볼 규칙이 제정되어졌다. 럭비 풋볼은 1850년대와 60년대까지 [[퍼블릭 스쿨]]을 중심으로 잉글랜드 전역에서 유행했다.][* 공교롭게도 풋볼 계열 최초의 규칙인 럭비 풋볼의 제정년도가 현대 [[야구]] 최초의 규칙이랄 수 있는 [[알렉산더 카트라이트]] 룰의 제정년도와 같은 1845년도다.] 이후 헐(Hull)시티의 법무관(현재 변호사)였던 '''초대 FA 회장이 되는 에베니저 콥 몰리(Ebenezer Cobb Morley)'''가 통합 [[풋볼]]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 운영 기구 창설과 이를 위한 회의를 제안하는 글을 신문에 실었고, 1863년에 런던 프리메이슨 테이번 선술집에 회의 참가자들을 소집한 그 자리에서 FA를 결성하고 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1863년'''의 회의는 [[풋볼]] 클럽들을 통합하기는커녕 '''[[럭비]]와 [[축구]]를 완벽하게 갈라서게 만들었다.''' __공을 가진 선수를 붙잡거나(홀딩), 저지하거나(태클), 정강이를 걷어차는__ 이른바 '''해킹(Hacking)'''을 허용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섯 번의 회의를 거쳤음에도 구성원들의 전원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FA가 결국 해킹을 금지하는 쪽으로 규칙을 명문화하자 해킹을 찬성하던 당시 대다수의 클럽들은 FA를 탈퇴해버리고[* 해킹 금지를 반대했던 럭비 풋볼을 따르던 풋볼 클럽들은 1871년 [[럭비 풋볼 유니온]]을 결성하였다.], FA는 런던 주변 11개 클럽만이 참여한 단촐한 모양으로 발족하게 된다. 해킹을 찬성하는 쪽이 주로 [[퍼블릭 스쿨]] 출신의 상류층이었고, 탈퇴하면서 '''해킹이 없는 풋볼은 천박하고, 계집애 같은 풋볼(Sissyball)이다'''라며 맹비난하며 떠났기 때문에 '''이후로 축구는 지금까지 쭉 노동자 계층, 즉 워킹 클래스(Working Class)를 위한 서민 스포츠로서 성격이 잡히게 된다.''' FA가 규칙에서 해킹을 금지하면서 __공을 잡고 골문을 향해 달릴 수 있다__는 규정인 '핸들링'도 같이 세트 메뉴로 빠지게 된다. 해킹이 불가능하다면 공을 품에 껴안고 뛰는 선수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경기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는 핸들링의 유무가 럭비와 축구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으로 보이겠지만 당시엔 해킹이 [[젠틀맨|신사도]]와 관련되어 있었기에 훨씬 민감한 이슈였다. 이후 FA 규칙대로 진행되는, '공을 들고 뛸 수 없고 사람을 때릴 수 없는 풋볼'을 Association Football(협회식 축구)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것을 하는 사람들을 Association에서 따와 'Assoccer'라 부르게 되었다. 앞의 As를 더 빼서 더 짧게 'Soccer'로 불리게 된다.''' 단, 이때 FA가 제정한 규칙은 해킹과 핸들링만 금지했다뿐이지 럭비처럼 오프사이드 룰이 매우 강해서 전진 패스가 아예 불가능했으며, 골대가 공중으로 한없이 길고, '''공중 볼을 손으로 캐치하면 프리킥을 주는 등'''[* 이는 럭비나 미식축구를 포함한 다른 [[풋볼]]에는 Fair Catch나 그와 비슷한 룰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축구라기보다는 여전히 [[풋볼]]에 가까운 면이 있었다. 기존의 풋볼과는 다른, 축구만의 정체성은 오랜 기간 동안의 점진적인 규칙 개정을 통해서 갖추어졌다. 규칙 개정에 대한 내용은 [[축구/역사#규칙|아래 문단]] 참고. 한편 FA의 가맹 클럽은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1871년에는 최초의 축구 대회인 '[[FA컵(잉글랜드)|FA컵]]'이 탄생하며 축구는 근대 스포츠로서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1886년에는 잉글랜드의 [[맨체스터]]에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의 축협이 참여한 가운데 [[국제축구평의회|국제축구평의회(IFAB)]]가 탄생하여 세계 최초의 국제 축구 규칙이 만들어졌다. 1888년에는 잉글랜드에서 최초의 프로축구 리그인 [[잉글리시 풋볼 리그]]가 탄생하였다. 영국인들이 즐겨하던 축구는 마침 [[대영 제국]]의 전성기와 맞물려 급속도로 전세계에 보급되기 시작한다. 영국의 상인, 군인, 선교사, 유학생들은 자신이 가는 나라마다 축구를 보급했고, 20세기 초가 되면 전세계에서 축구를 하지 않는 나라를 찾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후 1904년, 프랑스에서 쥘 리메에 의해 [[FIFA]]가 설립되면서 축구는 국제적인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고 1930년 우루과이에서 제1회 FIFA [[월드컵]]이 열리게 된다. 위에 서술한 대로 '''세계 최초 프로 리그가 생긴 [[잉글랜드]]에서도 가난한 노동자들의 대회로 무시당하고 심지어 [[FA컵(잉글랜드)|FA컵]]도 초창기에 엄청 무시당했던 역사가 있다.''' 참가 팀인 대학 팀이 조정 경기를 보러 간다고 기권하는 일도 있었으니... 이러다보니 초기 축구선수 수입은 엄청 적었는데 1900년대 초반 평균 월급은 5파운드 수준이었다. 헐값이야 아니었지만 거액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보통 직장인 월급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다. 1920년대에는 선수 평균 월급이 100파운드 이상으로 확 뛰어오르기 시작했고, 그 즈음 스페인, 이탈리아에도 차례로 프로축구 리그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축구와 축구 리그 붐은 서서히 더 퍼져갔고, [[월드컵]]의 탄생 및 여러 우여곡절로 축구의 인기는 세계적으로 더 퍼지게 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 피폐해진 각국에서 전쟁의 아픔과 전쟁의 욕구를 스포츠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의견들이 있었고, 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된 1950년대에 범유럽을 아우르는 축구 대회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는 의견이 많아지면서 1954년엔 [[UEFA]]가 출범하고, 다음 해인 1955년엔 1992년에 [[UEFA 챔피언스 리그]]로 명칭을 바꾸는 [[유러피언 컵]]이 출범하게 된다. 이후 1960년엔 1994년에 [[UEFA 컵위너스컵]]으로 이름을 바꾼 뒤 1999년에 폐지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이, 1971년엔 2009년 [[UEFA 유로파 리그]]로 명칭을 바꾼 [[UEFA컵]]이 출범한다. 1960년대부터 컬러 TV의 대중화가 시작되고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대회부터 최초의 컬러 TV 방송 중계가 이루어지면서 [[FIFA]]를 비롯한 축구 연맹과 각국의 리그는 중계권료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축구는 매우 상업성이 높은 스포츠로 간주되었고 수많은 자본가들이 축구 대회나 리그, 구단, 선수 등 축구에 다양한 방식으로 투자하기 시작하면서 빅 리그, 빅 클럽의 존재가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