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추신구라 (문단 편집) === 아코 사건 === 추신구라의 배경이 된 아코 사건은 [[1701년]] [[4월 21일]](겐로쿠 14년 3월 14일)에 일어난 일이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효고현]] 서부 지역인 아코번(赤穂藩)[* 석고 5만 3천석. 지금도 [[효고현]]에 [[아코시]](赤穂市)로 이름이 남아 있다.]의 영주인 [[아사노 나가노리]](浅野長矩)[* 본명. 보통은 피휘하여 관직명을 따 아사노 타쿠미노가미(浅野内匠頭)라고 부른다. 추신구라를 본 사람이라면 이쪽이 익숙할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처남이자 [[오봉행]]었던 아사노 나가마사가 고조부이다. 즉 나가마사 3남의 증손자가 아사노 나가노리였다.]는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 성에서 [[천황]]의 조정이 보내오는 칙사인 부케텐소(武家伝奏)[* 소송, 예식 등의 분야에 관해 천황과 막부 사이에서 연락관 역할을 하던 관직]를 맞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 교토에 있었던 [[천황]]과 조정은 실권은 전혀 없다시피한 존재였지만 형식상으로는 일본의 최고위 통치기관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신의 자손에게서 인정받은 일본의 통치자'라는 정통성을 막부가 계속해서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천황과의 [[의전]] 관계가 매우 중요했다.[* [[유럽]]의 역사에서 [[교황]]이 [[사코 디 로마]] 사건 이후 세속에서의 권력이 내핵으로 처박힌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포함한 [[가톨릭]] 국가의 군주들이 꼭 교황에게서 대관을 받음으로써 종교적인 권위를 보장받은 것과 같다. [[일본/역사|일본사]]에서는 유럽사의 교황이 하던 역할을 [[천황|덴노]]가 했던 것이다.] 이 임무는 10만 석 이하, 평균 3~5만 석의 영지를 가진 소[[다이묘]]들에게 맡겨진 임무였는데, 접대비용을 모두 자기가 부담해야 하는 등 제반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서 다들 기피하고 있던 직무였다. 아사노 나가노리가 이 직무를 맡게 된 것은 [[소금]] 판매로 인한 재정개혁이 성공해서 어느 정도 살림이 편 상태였던 데다가 이전에도 칙사 접대역을 맡았기 때문에 칙사를 접대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점도 참작되었다. 그런데 에도 막부에서 의전을 담당하는 집안인 고케(高家, 고가)의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 1641 ~ 1703)[* 본명. 보통은 피휘하여 관직명을 따 키라 코즈케노스케(吉良上野介)라고 부른다.]는 아사노에게 사신을 대하는 격식에 대해서 나무랐고 이에 격분한 아사노는 '''[[히가시야마 덴노]](東山天皇)의 명령을 받은 3명[* 야나기하라 스케카도(柳原資廉, 1644 ~ 1712), 타카노 야스하루(高野保春, 1650 ~ 1712), 세이칸지 히루사타(清閑寺熈定, 1662 ~ 1707)]의 부케텐소가 근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칼을 빼들고 휘둘러 키라 요시히사를 다치게 하는''' 엄청난 사고를 쳤다. [[쇼군]]이 거주하는 에도 성 혼마루에서 칼을 뽑은 것만 해도 이미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는데 그에 더해 천황의 부케텐소를 영접하는 중요한 자리를 망쳐놓은 데다가 하극상으로 상관을 다치게까지 했으니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상관이라고는 하지만 키라 가문은 봉록 4,200석 정도의 [[하타모토]] 가문이었고, 아사노 가문의 아코번은 그 10배가 넘는 50,000석 규모였다. 물론 키라 가문이 도쿠가와 막부에서 고케(高家, 고가) 하타모토 가문으로 막부의 요직을 맡고 있었고, 1,000석 이상의 하타모토는 다이묘와 동격이긴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