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추신구라 (문단 편집) === 결론 ===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 키라는 아사노와 달리 아무 처분도 받지 않았다. 키라가 뭔가 비슷한 대가를 치러야 죽은 아사노 및 아사노 가문의 체면이 선다. * 2. 막부가 결국 아사노의 동생에게 대를 잇게 해주면 그나마 체면이 설 수 있다. 그러나 막부로서는 한 번 내린 결정을 뒤집으면 반대로 자신들의 체면이 서지 않으므로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 3.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 가신들이 직접 키라를 죽여 주군과 가문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 이런 결론은 아사노의 가신들만의 특이한 생각이 아니라 '''당대의 사무라이 계급이라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이었다'''. 실제로 에도의 과격파들이 보낸 서신에 따르면 다이묘부터 하급 사무라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에도 사무라이들이 "아사노 가(家)는 명예를 알기에 주인의 적을 살려두지 않을 가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거나 "막부가 차후 백만 석([[고쿠]])을 아사노 가문에 내린다 해도 체면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평판이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막부조차 아사노 가문의 가신들이 키라에 대한 복수극을 펼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이를 어쩔 수 없다 여겨 못 본 체 방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 문제는 사무라이 세계관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이 복수가 막부 통치라는 제도와는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사무라이의 가치관에 따르면 가신들의 복수는 당연하고 옳지만 어찌 됐든 막부를 거스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는 ''''사무라이답게 키라를 죽여 주군의 원한을 갚은 가신들의 처우를 사무라이 계급의 통치자인 막부로서는 어떤 식으로 결정해야 현명한 것일까?'''' 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오죽하면 복수를 결행한 46명의 낭인 본인들조차 이 복수를 할지 말지 여부를 둘러싸고 2년여에 걸쳐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을 정도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추신구라가 에도 시대 내내 논란이 되었고, 민간의 전설이 되기까지 한 것이다. 즉, 이 사건은 에도 막부의 정체성과 그 시대의 사무라이들이 갖고 있는 본질성, 양자에 내재된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무사도' vs '법치'의 양대 문제의 충돌이 발생한 사건. 당시 일본은 150년에 이르는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가 자리잡은 후, 전국시대의 유산인 광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무사도를 폐기하고 막부가 주도하는 [[관료제]] 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였다. 알다시피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 역사상 가장 긴 평화시대를 열었던 정부다.[* 도쿠가와 이전에도 막부는 있었지만 하나같이 단명했으며 통치권력도 안정적이지 못했다.] 따라서 막부 입장에서는 사소한 충돌로 칼부림하고 사적인 복수를 미덕으로 찬양하는 전시대의 무사도를 용납할 수 없었고,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전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각 번들의 사적인 무력을 축소하고 막부를 절대 권력기관으로 군림시키려고 했다. 당연히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사건 이후 막부는 아사노 가신들의 사후 처리에 대해서도 골치를 썩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처리했어도 커다란 논란이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아사노 사건과 달리 가신들에게 할복을 명한 것은 사건 이후 무려 50여 일이 지난 뒤였고, 그나마도 그냥 복수만 한 게 아니라 저택의 무고한 남녀노소까지 함께 살해한 죄까지 고려한 결과였다. 막부가 최초에 아사노의 칼부림 사건을 반나절도 안 걸려 처리했던 패기와 비교해보면 쇼군 츠나요시의 경솔함이 이 사건을 얼마나 큰 규모로 키웠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