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추신구라 (문단 편집) ==== 영지 몰수 ==== 다음으로 문제가 된 것은 [[가이에키|영지 몰수]]. 사실 에도 시대에는 이 문제는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내재된 명예, 공법, 도리 등의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와는 달리 영지 문제는 물질적인 생계의 문제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여러 사람의 생계'가 걸린 문제로서 실제로는 사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츠나요시 집권 직전에는 낭인들의 증가를 막기 위해 막부가 영지 몰수를 하는 것을 되도록 자제했었다. 츠나요시가 집권하면서 낭인들 따위는 상관없다는 정책을 펼쳤을 뿐. 그리고 160년 뒤에는 [[안세이의 대옥]]으로 미토번에 대규모 낭인이 발생하면서 [[사쿠라다 문 밖의 변|대낮 백주대로에서 일반 다이묘도 아니고 쇼군 바로 아래의 직책인 다이로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심지어 영지 몰수와 가문 단절이라는 엄벌이 없었다면 추신구라 사건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남겨진 편지 기록에 따르면 추신구라 이야기의 주인공 쿠라노스케, 즉, 가로(家老) 오이시 요시오는 '영지를 돌려받고 죽은 아사노의 동생이 가문을 잇게만 해준다면 가문의 명예를 지킬 수 있게 되니 만사가 해결된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일단 아코의 가신들이 영지를 잃어 낭인이 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아코 번의 가신들은 둘로 견해가 나뉘었다. 오이시 요시오 등의 온건파는 위에 언급한 대로 영지만 돌려받으면 된다는 입장이었고, 이에 반대하는 측은 "그런 건 필요 없고 무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때 오이시 등의 온건파는 [[교토]]에 머무르며 다른 다이묘들에게 청원을 넣는 등의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반대측인 과격파는 [[에도]]에 머무르는 식이었는데, 덕분에 이들은 2년간에 걸쳐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서신으로 논의한 기록이 후세에 남을 수 있었다.] 과격파들이 최초로 주장한 것은 키라 암살이 아니었다. 이들이 처음에 주장한 것은 [[전쟁|막부의 몰수에 대항해 아코에서 농성하자]]는 것. 그러나 2년씩이나 지났음에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오이시 방식의 해결이 불가능함을 의미했다. 과격파는 농성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나자 에도로 올라가 키라 암살을 목표로 잡았고, 오이시는 과격파들의 견해를 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오이시 요시오는 키라 습격이 기정사실로 정해지자 습격에서 빠지기는 커녕 가로(家老)로서 선두에 나서 지휘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미 이 당시에도 집단의 방침이 정해지면 자기 뜻과는 달라도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일본인]]의 사고방식이었음을 의미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