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추신구라 (문단 편집) ==== 키라 ==== 다음으로 지적된 논란 중에 '''키라는 왜 벌을 받지 않았냐'''는 것이 있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피해자가 벌을 받지 않은 건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혹시 피해자인 키라가 원인제공자인데 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는가?'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원인 같은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당대인들은 사고방식 자체가 현대인과는 달랐다. 당대인들의 방식에 따르면 '''아사노가 할복을 했으니까 상대방인 키라 역시 할복을 해야만 했다.''' 왜냐면 전국시대 무렵 형성된 사무라이의 관습법인 겐카료세바이(喧嘩両成敗)[* 참고로 이 법도도 [[가마쿠라 막부]] 시절의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가 원조이다. 이 법에서는 살인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금지하며, 어길 시에는 유배형에 처해진다. 수백년 전인 가마쿠라 시대 기준으로도 키라는 개역 후 유배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__'싸움을 한 사무라이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당사자들 모두에게 '''동일한 처분'''을 내린다'__였기 때문. 전국시대에 군령을 통일하고 같은 세력내의 다툼을 억제하기 위해 각국 다이묘들이 도입한 뒤 '천하의 법도'라고 불릴 정도로 확고히 정착된 원칙이었다. 이 원칙 덕에 당대 사무라이들에게 '이유는 중요치 않다, 참을 수 있는 정도인가 없는 정도인가의 문제', '명예를 위해선 자신의 죽음도 각오하고 벤다'는 사고방식이 굳어지게 된 것. 따라서 '''원인과 이유를 불문하고''' '싸움의 쌍방 당사자인 아사노와 키라의 처분이 다르다'는 것은 당대 모든 사무라이 계급의 반발을 불러왔다. 키라는 현대 시점에서 볼 때야 칼침 맞은 피해자이지만, 이 당시 논리에 따르면 범인인 아사노와 똑같이 할복해야 한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막부가 키라는 무죄, 아사노는 할복이라는 처결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키라가 칼자루에 손조차 대지 않은 채 아사노가 휘두른 칼에 일방적으로 베였다는 것이었다. 키라는 아사노가 휘두른 칼에 이마를 베인 뒤 돌아서서 도망쳤고 아사노는 이를 쫓아가며 칼을 휘둘렀는데, 무사도의 관점에서 보자면 '적(아사노)'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인 키라는 할복조차 아까운 비겁자, 무사라는 직함이 아까운 겁쟁이였지만 막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막부가 내린 에도성 내의 사적인 칼부림 금지령을 끝까지 지킨 충신이었던 셈이니 처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이를 처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늘날과 유사한,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인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