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추신구라 (문단 편집) ==== 정말 사소한 다툼이었을 것이다 ==== 다만 위의 의혹들은 당시 상황과 정서를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본 것이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잘 알려진 대로 사소한 다툼이 실제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에도 막부 초기까지만 해도 사무라이들은 그것보다 더 시시한 이유로 [[칼부림]]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본 사건으로부터 약 70년 전인 1630년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다. >[[마에다 토시이에]]의 손자 마에다 히고가 친구들과 다리를 건너던 도중 반대쪽에서 무라세와 사카베라는 두 사무라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히고와 사카베의 칼집이 서로 부딪치자 마에다 히고는 즉시 부채로 사카베의 어깨를 쳤고 사카베는 즉시 칼을 뽑았다. 무라세와 사카베는 현장에서 살해당하고, 사건을 전해들은 무라세의 부친 무라세 규우에몬이 현장으로 돌진, 히고의 가신 두 명을 죽이고 자신도 살해당했다. 사카베의 부친 사카베 지로베이도 현장에 난입했으나 '구경꾼이 너무 많아' 싸움에 끼어들지 못했는데, 이를 부끄러워하여 머리를 깎고 출가해버렸다. > >영주였던 마에다 가문은 보고를 받고 양쪽 모두 처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냥 시비 붙어 싸운 거라 처형하자면 자기 가문 사람도 할복을 시켜야 하는 판이니… 마에다 히고는 죽는 날까지 복수를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요즘 사람 생각에는 칼집 좀 부딪쳤다고 이런 일이 일어날까 어이가 없다 싶겠지만 그것이 당대 일본 사회의 인식이었다. 혹 목격자가 없는 한적한 곳에서 일대일로 마주쳐 저런 일이 발생했다면 피바람을 피하고 싶은 것이 내심 사람의 본능적인 심경이니 적당히 서로 모른 체하고 지나가는 해결책을 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심지어 이런 경우에조차 깐깐한 성격의 무사라면 사과하라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이미 체면이 손상당했으니 그냥 지나가면 망신'''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상대방한테서 사과를 받아내야 체면치레가 되는데, 당연히 상대방도 마찬가지 입장이므로 좋게 해결나기 어렵다. 일본 문화를 다룬 인류학 명저 [[국화와 칼]]에서는 다이묘가 가신들에게 칼을 보여주며 주조 장인이 누구인지 퀴즈를 낸 사건이 소개된다. 가신 셋 중 한 명만 정답을 맞췄는데, 나머지 둘은 이 때문에 굉장한 모욕을 당했다고 여겨 정답을 맞춘 가신을 죽여버리려 애썼고(...) 몇 번 실패한 끝에 마침내 죽여 복수에 성공했다는 이야기. 이런 사례들을 보면 소금이니 사례금이니 하는 이유는 쓸데없이 복잡한 것. 그 당시 사무라이의 사고방식이란 '자신이 느끼기에 모욕이면 각오하고 칼을 뽑아야 한다'는 것으로, '''그 세세한 이유가 타당한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 역시 아사노가 칼을 뽑은 이유에 대해 그렇게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문제의 원인을 파악해 해결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