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추수폭동 (문단 편집) === 봉기의 실패 ===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마오쩌둥은 9월 9일 중앙의 지시 없이 폭동 실행을 결심했다.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면서 철로 운행이 중단되어 장사로 향하는 어떤 기차도 도착하지 못했다. 9월 10일, 2연대가 안원에서 계획대로 봉기하여 평향을 공격했고 12일 예릉을 점령하여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지주의 토지 몰수, 노동조합과 농민협회 복원을 선언했다. 하지만 [[국민혁명군]]의 반격에 2연대는 곧 예릉에서 철수했다. 9월 15일 2연대는 유양을 공격했다가 병력의 삼분의 이를 잃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1연대와 4연대는 평강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4연대가 도로 국민혁명군에 투항하여 1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1연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고 패주해야 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노농군 1군 사령관 여주도가 국민혁명군에 투항했고 탈영병이 끊이지 않았다. 농민들의 호응은 시원치 않았고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3연대는 계획대로 동문을 점령했지만 나머지 연대들이 궤멸된 상태에서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9월 14일 마오쩌둥은 잔여 병력에게 자신에게 모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9월 15일 마오쩌둥은 장사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기로 결정하여 영도로 퇴각했다. 마오쩌둥은 영도에서 병력을 재편성하고 잔류한 천여명의 봉기군을 모아놓고 물었다. >"혁명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포기하고 말 것인가?" 이에 남은 병사들이 모두 외쳤다. >"혁명의 길로!" 이에 마오쩌둥은 봉기군을 인솔하여 장사에서 동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문가로 퇴각했고 그곳에서 정강산으로 들어갈 것을 선언했다. 9월 21일 봉기군은 정강산으로의 고된 여정을 시작했다. 쿠추모프는 격노하여 마오쩌둥이 '가장 경멸할 만한 속임수요 비겁한 행동'을 했다고 비난했고 마오쩌둥과 펑공다가 중국식 속물주의의 실체를 드러냈다고 했다. 모스크바에서도 추수폭동이 웃음거리가 된 봉기라고 날뛰었지만 이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장융(1952)|장융]]은 마오쩌둥이 애초에 추수폭동을 일으킨 이유가 [[난창 폭동]] 이후 광동으로 남하하던 봉기군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려는 속임수였다고 주장하는데 비슷한 주장을 하는 다른 권위있는 연구들은 보이지 않는다. 상하이 임시정치국은 런비스를 취추바이의 전권대표로 파견하여 펑공다를 비서로 유임시키고 폭동을 재조직하려 했지만 이미 폭동을 조직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은 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