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추수폭동 (문단 편집) === 마오쩌둥의 소비에트 수립과 토지분배 주장 === [[8.7 긴급회의]]가 끝난 후 [[취추바이]]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준 [[마오쩌둥]]은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상하이의 당중앙에서 일하는 것을 제안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최전선에 보내달라고 요청하며 최소한 5개 현에서 폭동을 일으키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취추바이는 1927년 8월 9일 마오쩌둥을 중앙위원회 특별 대표로 삼아 정치국 후보위원 펑공다와 함께 호남에 파견하여 폭동을 준비하였다. 폭동을 위해 중국공산당 호남위원회가 개편되었다. 8월 12일 마오쩌둥이 장사에 도착했을 때, 장사는 허극상의 반공 숙청으로 인하여 기존에 3천명에 달하던 당원 중 100명만이 겨우 살아남은 상태였다. 마오쩌둥은 장사 주재 소련 영사이자 코민테른 지역대표인 블라디미르 쿠추모프와 함께 '농민혁명과 반동정권 전복'을 위해 폭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호남위원회 서기 이리롱을 만나 8월 15일 소련 영사관에서 지역위원회 모임을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가족들을 보기로 잠시 [[양카이후이]]와 자식들이 살고 있던 반창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회의는 연기되었지만 8월 16일의 회의에서도 마오쩌둥은 나타나지 않았다. 8월 18일 가족들을 데리고 장사로 돌아온 마오쩌둥은 그의 부재를 질타하는 동지들에게 농민들의 형편을 조사했다고 변명했다. 마오쩌둥은 8월 20일 중앙위원회에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국민당은 이제 더 이상 대중에게 호소하는 데 효과적 방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우리는 더 이상 국민당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 이제는 이미 흑기에 지나지 않는 국민당 깃발은 그들이 지키도록 내버려두고, 우리는 지체없이, 그리고 결연히 붉은 깃발을 들어야 합니다. (...) 호남 농민들은 토지 문제에 관한 완전한 해결을 절대적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 소지주와 자경농을 포함해 모든 토지를 몰수하고 공유화하고 농민협회가 '공작능력'과 '소비량', 두가지 표준에 따라 토지를 얻고자 하는 모든 향촌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해야 합니다.|| 호남 농민들이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요구한다는 것은 마오쩌둥의 비약이었지만 볼셰비키 혁명의 고조기가 다다랐다고 여긴 마오쩌둥은 급진적 주장을 계속했다. 마오쩌둥은 또한 회의석상에서 농민들이 호응하지 않을 가능성을 대비해 이런 주장도 했다. >"만약 우리가 이번 폭동을 조직하고 촉발시키려면 오로지 농민들에게만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군사적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한두개 연대의 도움이 있어야 폭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 만약 정권을 탈취하는 데 군사력의 도움 없이 하고자 한다면 이는 자기기만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당이 이전까지 저질렀던 과오는 군사를 무시한 데서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의 힘 가운데 60%를 군사 운동에 집중해야 합니다." 호남위원회 대부분이 마오쩌둥을 지지했지만 이리롱은 마오쩌둥의 급진적 주장에 반대했다. >"만약 우리가 소지주들의 땅을 몰수한다면 그들은 혁명을 반대하는 대지주들의 진영에 설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들의 땅을 몰수할 시기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리롱의 말은 무시되었다. 마오쩌둥과 펑공다는 소비에트를 수립하고 위로부터 혁명을 추구할 것을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이러한 급진적 주장에 로미나제의 임시정치국은 호남으로 긴급서한을 보내 마오쩌둥의 견해를 군사 모험주의로 지칭하며 반대했고 소비에트 정부 수립, 전면적인 토지 재분배 등을 묵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