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추(성씨) (문단 편집) === 역사 === 본디 [[중국]]에 기원을 둔 [[성씨]]로서 [[한국]]보다 [[중국]]에 기록이 훨씬 많이 남아있는데, 중국 춘추5패 [[제환공]]의 대부(大夫) 중손추(仲孫湫)가 그 아들의 성명(姓名)을 추호(湫胡)로 짓고 추(湫)를 추(秋)로 사용하면서부터 생겨난 성씨이다. 시조 추엽은 중국 [[남송]] [[고종(송)|고종]] 소흥 11년(서기 1141년) 문과에 급제하여 적부라직을 역임하였다. 적부라는 오늘날의 국립도서관장. 그는 [[인종(고려)|고려 인종]] 때 가솔을 이끌고 [[함흥]] 연화도에 정착하여 한국 추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 추엽의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시]] 연화도에 있으며, 1868년(고종 5년) 통훈대부 연천현감 남정하가 묘갈명을 썼다. 추엽의 아들 추황(추영수)이 1209년(희종 5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고려사]] 권74, 지제28, 선거(選擧)2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levelId=kr_074r_0010_0010_0080_0550|#]]] 1213년(강종 3년) 문과에 급제한 후 몽골의 침략으로 1232년(고종 19년)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항전하던 비상 시대에 임금을 잘 모신 공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문하시중]]을 역임하였으며, 명유 우대정책에 힘입어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였기 때문에 이학종사(理學宗師)로 추앙받았다. 추황의 아들 추적은 1260년(원종 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안동서기·직사관을 거쳐 좌사간에 오르고, [[충렬왕]] 때 민부상서와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추적은 시랑 겸 국학교수로 재임할 때 《[[명심보감]]》을 편찬하여 중국에 전파하였다. 추적의 장남 추진은 교서랑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원주]] 판관을 지낸 다음, 천장시에 급제함으로써 일약 보문각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공민왕]]이 등극한 후에 광록대부 병부상서가 되었으며, 친원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자 과업을 수행하였다. [[공민왕]] 12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궤장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충효.[* 추적의 차남 추뢰 또한 [[국학]]에서 배운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사간원 사간에 이르렀다.[* 추뢰의 아들 추영은 [[충목왕]] 때 철성부 판관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는데, 일을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아 왕명을 출납하는 요직인 지신사로 승진하였다. 다만, 이를 시기하는 소인배들의 참소로 부당한 탄핵을 받아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얼마 후에 [[공민왕]]이 즉위하자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이성계]] 일당의 역성혁명을 보고 분개한 추형은 관직을 버리고 한때 현령으로 있었던 [[강원도]] [[평창군]]으로 들어가 청빈낙도하며 초야에 묻혀 시서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 추진의 장남 추유는 1362년([[공민왕]] 11년) 18세에 성균시에 급제하였으나, 권세와 간신배들로 인하여 기울어져 가는 [[고려]]를 떠나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여기서 한국의 추씨들이 분화된다. 중국으로 귀환했던 추유의 후손들은 10세손 추수경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 [[명나라]] 총병 [[이여송]]의 부장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한국에 남아있던 추진의 후손들은 8세손 추익한에 이르러 다시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게 된다.] 한국 [[양쯔강]] 하류 강변에 있는 고찰 금산사에 도착하여 [[주원장]]을 만나 혈맹을 맺고, 호주 출신의 지장 서달과 탕화와도 동지로서 뜻을 같이하기로 맹세하였다. 1363년 화주에서 반원군의 지도자 진우량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추유는 이 결전에 행군총관으로서 치밀한 작전을 세워 성의백과 함께 첫 출전하여 승전을 올린 것이다. 추유는 명나라 개국공신으로 병부시랑 좌간의대부가 되어 북벌군에 합류하여 [[원나라]]의 수도 [[연경]]을 점령하고 [[몽골]] 세력을 멀리 [[카라코룸]]으로 몰아냈다. 벼슬은 호부상서에 이르렀다. 1393년(홍무 26년) [[명나라]]의 안위사로서 [[조선]]을 방문하였다.[* 추진의 차남 추협 또한 1363년 형 추유를 따라 [[중국]]으로 떠나 [[절강성]]에서 농민군을 모아 한때 8,000명의 군세를 거느리고 [[명나라]] 창업에 큰 훈공을 세워 추유와 함께 건국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벼슬은 태복에 이르렀다.] 추유의 아들 추귤은 1392년([[명나라]] 홍무 2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산동첨사가 되자 [[영락제]]를 황제의 보위에 올린 공신이 되어 상서좌복야에 이르렀고, 추귤의 아들 추섭은 1438년(정통 3년) [[명나라]]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사인 등을 역임한 뒤 [[안찰사]]가 되었다. 추섭의 아들 추서는 [[명나라]] 성화 원년(1465년) 문과에 급제한 뒤 도지휘사가 되었을 때 [[왜구]]가 [[명나라]] 해안의 도처에 침범하자 봉수제를 시행함으로써 왜구를 소탕하였으며, 벼슬은 병부상서에 이르렀고, 추서의 아들 추천일은 [[명나라]] 정덕 원년(1506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정덕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좌시랑을 지냈다. 한편, [[조선]]에 남아있던 8세손 추익한은 [[홍문관]] 부수찬, 호조좌랑을 거쳐 호조정랑으로 승진한 뒤, 한성부윤을 끝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인 [[강원도]]로 낙향하였다. 영월 유배 중인 [[단종(조선)|단종]]을 극진히 모신 충신으로 단종의 영정을 모신 영모전과 충절사에 엄흥도·정사종과 함께 배향되었다 10세손 추수경은 [[명나라]] 문과에 급제하여 안찰사 등 요직을 역임한 후, 벼슬은 무강자사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여송]]의 부장으로서 [[명나라]] 총병아장으로 아들 5형제와 함께 조선에 파병되었다. 곽산, 동래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참전한 아들들과 [[전주]]의 추동에서 살았다. [[정유재란]] 때 전주싸움에서 전사하여 사후에 완산[[부원군]]에 추봉되었는데,[[선조(조선)|선조]]가 공을 기려 본관을 부여하였다. 전주 추씨의 시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하였는데, 한말 칠의사[* 추치경(추성손), 김용이, 김재관, 오문룡, 우재봉, 박원용, 우규하] 중 한 사람인 추치경은 [[충주]] 장현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하였고, 추용만과 추용소 형제[*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는 [[합천]]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또한 추기엽은 [[해남]]·[[영암]] 등지에서 150여 명의 부하 의병을 이끌고 육지와 해상에서 일본군과 대소 40여 회의 전투를 수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순국하였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추삼만, 추진구, 추칠성 등에 대하여도 활발한 의병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 외에 [[독립운동가]] 추교철은 1919년 7월 군자금 모집을 통해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비밀결사 독립애국단을 조직하는 한편,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 모금지령서를 교부받아 자산가들에게 [[독립군(한국)|독립군]] 명의의 사형선고서를 우송하며 군자금 수합활동을 펴다가 1920년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고,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 추경춘, 추공집, 추규영, 추득천, 추병갑, 추병륜, 추병원, 추성렬, 추성배, 추은명, 추홍순 등도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공로로 정부에서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과 [[건국훈장]] 애국장, 그리고 [[대통령]]표창 등을 추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