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희암 (문단 편집) === 지도자 시절 === ||<-2>[[파일:external/www.donga.com/200312050241.jpg]] || ||<-2> 전성기인 연세대 감독 시절. || 이후 [[현대건설]]에 몸담으며 1985년 이라크 바그다드 지사에서 근무한 바 있었고, 이듬해 귀국해서 [[삼일중학교]] 체육교사로 재직하다 모교인 연세대학교 농구부의 김동원 감독이 갑작스레 물러나자 감독대행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1986년 3월 [[연세대]] 코치로 부임했는데, 후임 감독이 올 때까지만 팀을 맡는 한시적 감독 대행이었다. 그런데 후임 감독이 17년 뒤에 오더라(웃음). 처음에는 잘 가르치고 열심히만 하면 좋은 성적이 나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 좋은 선수를 모으는 것이 70%, 잘 가르치고 관리하는 것이 30%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스카우트에 힘을 쏟게 됐다.” 이후 정식 감독으로 승격하여 [[중앙대]]에 밀려 침체하는 팀을 살리고자 맹훈련으로 리빌딩에 착수했고, 먼저 [[정재근(농구)|정재근]]과 [[이상범(농구)|이상범]], [[오성식(농구)|오성식]], [[문경은]], [[이상민(농구)|이상민]] 등 고교농구의 특급 유망주들을 낚아챘고, 거기에 [[김훈(농구)|김훈]], [[우지원]], [[서장훈]], [[황성인]], [[조상현]] 등을 사서 완전체를 만들었다. 또한 문경은을 연세대로 스카우트했을 때도 이렇게 말하길, >“당시 경은이는 광신상고에 다녔는데 이 학교 농구부장이 경희대 농구후원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광신상고 선수들은 경희대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농구부장을 만나보니 문경은을 데려가고 싶다고 한 감독은 처음이라고 했다. 다른 대학 감독들은 광신상고와 경희대의 관계를 의식해 미리 포기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경은이를 데려가려면 동기생 4명을 다 데려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순간 큰 결심을 했고, 경은이와 다른 3명의 선수를 다 데려왔다. 그게 ‘신의 한 수’였다. 경은이가 연세대의 기둥 노릇을 맡게 됐으니까.” 그의 감독 커리어에서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연세대학교 감독 시절 그는 철저하다못해 극단적인 분업 농구의 신봉자였다. 선수들의 역할을 철저하게 분업화하고, 외곽 슈터 중심의 농구를 통해 연세대를 강팀으로 만들었다. 실업팀과 대학팀을 망라한 농구대잔치에서 3차례 우승했고, 특히 1993~94년 시즌 우승은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우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문경은 SK 감독은 인터뷰에서 감독 최희암을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연습할 때는 ‘독사’나 다름없는데, 경기할 때는 선수들에게 무척 살갑게 대한다고 했다. 선수들이 실전에서 자신이 가진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얘기다. 문 감독은 연세대 시절 최 감독의 강권에 못 이겨 하루에 슈팅 1000개씩을 쏘며 지옥훈련을 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연대 농구부 제자였던 김수환은 다른 팀보다 확실히 2배 이상의 다양한 전술을 운용해서 머리를 많이 쓰게 하는 감독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선수들에게 굉장히 가혹한 지도자로 얼음물에 속옷만 입고 들어가기, 시궁창에 빠트리기, 속옷만 입고 산을 타게 하는 등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는 듯한 훈련으로 악명이 높아 중도 포기자들이 속출할 정도였다. 특히 우지원은 오빠부대 앞에서 혼쭐나다 못해 최희암 감독이 무서워 도망치는가 하면 문경은은 가혹한 훈련으로 농구를 포기하겠다며 최희암에게 독대를 요청했고, 서장훈은 최 감독의 훈련에 반발해 농사나 짓겠다며 탈출을 시도했다. 또 김훈은 고향에서 전지훈련 당시 대전고와 연습시합하다 부진하여 부모와 친지, 동문들 앞에서 최 감독에게 매를 맞는 등의 일화가 있었다. 다만 선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과학적인 훈련과 선진화된 전술에 감화되어 최 감독을 점차 인정하고 따랐다. 또 그는 열린 사고로 팀을 운영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연세대가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할 때 내가 고려대 출신의 이우재 선생을 코치로 모셔왔다. 학교 측에선 라이벌 고려대 출신을 연세대 코치로 임명하는 데 반대했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선수들에게 다양한 농구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겨울휴가 때면 선수들을 용산고, 휘문고 등으로 ‘단기 유학’을 보냈다. 서장훈, 문경은 등 핵심 선수들을 모두 고등학교로 보냈다. 나보다 더 훌륭한 지도법을 가진 선생님으로부터 실전 농구를 배워 오라는 의미였다. 농구를 배울 수만 있다면 어떤 상황도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내 철학이었다. 배우는 걸 부끄러워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최희암을 설명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게 ‘패턴 농구’다. 그가 패턴 농구에 빠진 계기는 인디애나대 농구감독 밥 나이트의 농구이론 서적이다. 이 책에 나오는 농구 기술을 연세대에 맞는 훈련으로 접목하면서 팀워크를 중요시하는 패턴 농구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공격하는 상황에서 패스를 주고받다가 완벽한 슛 기회를 만들어 성공률이 가장 높은 슛을 던지는 작전이다. 서장훈이라는 ‘빅맨’. 문경은 우지원 김훈의 막강 공격력, 팀을 진두지휘하는 이상민의 영리함이 최희암의 패턴 농구를 완성시켰고, 성적으로 그것을 증명했다. >“내가 대학 팀 시절 우승을 밥 먹듯 한 데에는 상민이와 장훈이가 큰 역할을 했다. 두 선수가 연세대에 오지 않았다면 그런 성적을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장훈이가 상민이를 무척 좋아했다. 상민이 따라서 연세대에 온 것도 사실이고. 상민이가 심지가 깊어 장훈이를 살뜰하게 챙겼다. 상민이는 대학 4년 동안 한 번도 속을 썩이지 않았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받아들였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마디로 팀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아이였다. 반면에 장훈이는 개성이 강한 만큼 논리적인 설명을 들이대며 접근해야 했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터라, 감독이 우격다짐으로 몰아쳐도 절대 수긍하지 않았다.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면 쉽게 받아들였다.” 이 시스템 하에서 연세대 선수들은 철저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분담하며 무시무시한 포스를 발휘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선수들은 자신에게 특화된 역할 이외에는 큰 발전을 보이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슛하는 기계 취급을 받던 [[문경은]]과 [[우지원]]. 또한 고교 시절 194cm 장신 가드로 대활약하며 당시 국대 장신화에 목매던 농구계가 기대한 유망주 [[김택훈]]을 [[파워 포워드]]로 전향시킨 뒤, 단순한 리바운드나 수비만 맡기면서 결국 전체적 기량을 퇴보시킨 과오도 있다.[* 후에 [[김택훈]]은 프로에 들어오고 몇 년 뒤 다시 가드로 포지션 변경을 시도했지만 나이도 이미 30대인데다 [[파워 포워드]]로 뛴 지 오래되어 더 어정쩡하게 되어버렸다. 김택훈의 기량 퇴보는 골수 농구팬들이 최희암을 제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 그나마 올라운더였던 [[이상민(농구)|이상민]]의 경우는 그의 재능을 아껴 하고싶은대로 하도록 놔둔 편이었다. 당시 국보급 센터로 촉망받던 [[서장훈]] 역시 마찬가지.] ‘코트의 마법사’로 불리며 '아내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남자'를 컨셉으로 한 CF까지 찍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지만, 그의 성공 뒤에는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프로화 반대의 선두에 서서 농구팬들에게 비난을 받는가 하면 1998년 김수환 선수 파동으로 1년간 자격정지를 받았다. 그 후 [[김동우(농구)|김동우]]와 [[박광재]], [[전병석]]을 스카웃해서 [[1999 대학농구연맹전|제36회 전국대학농구연맹전]] 1차대회 우승[* [[고려대학교]],[[중앙대학교]]와 공동우승]을 이끌었다. 2001년 김남기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총감독으로서 일선에서 퇴진했으나, 동년 12월 3일 김남수 코치가 [[휘문고]]로 떠나자 감독직으로 되돌아갔다. 2002년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現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본인이 밝힌 프로 진출 이유는 >“이전에도 몇 차례 프로팀 감독 제의가 있었다. 그때마다 아내가 ‘남의 자식만 키우지 말고 우리 아이들 교육에도 신경을 써달라’고 만류하는 바람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큰아이가 2002년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프로행을 결심했다. 솔직히 말해서 돈도 작용했다. 대학 감독 월급이 프로 감독 연봉의 40%만 됐어도 학교에 남았을 것이다. 연세대 감독 시절, 남들은 내가 돈을 많이 벌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인들 경조사 때 축의금, 조의금 넉넉하게 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유명해지면 돈도 좀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프로행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강동희]], [[김영만(농구)|김영만]] 트레이드와 우지원 영입 등의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색깔 지우기 작업으로 비난을 받았다. 감독을 맡자마자 실업 기아자동차 시절부터 팀의 주축이었던 중앙대 출신들을 모두 정리하면서 사실상 팀을 공중분해시키고 그 자리를 자신의 제자들인 연세대 OB들로 채워버린 것인데 결과는 폭망이었다. 첫 해였던 2002-03 시즌에는 6위로 간신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2003-04 시즌에는 성적 부진으로 중도 사임했다. 그리고 그 시즌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는 꼴찌를 했다. 그나마 혁신적 시도를 한 게 원로 농구지도자 이우재를 [[http://mnews.joins.com/article/1856552|KBL 최초로 코치로 모신 정도였으며,]] 감독-코치 관계를 나이와 학력으로 따지는 우리나라 농구 풍토에선 파격적이었다. 이후 MBC와 MBC ESPN에서 해설위원을 역임하다 2005년부터 최성오 감독이 떠난 [[동국대학교]] 농구부 감독직에 앉아 1년 간 지휘했다. 본인은 그 시절을 ‘회춘한 1년’이라고 회상했다. 당시 [[동국대학교]]는 분위기가 엉망이었는데, 최희암은 기강을 잡은 후 [[동국대학교]]를 종별대회 준우승으로 이끄는 등 성과를 거뒀고, [[기승호]]·[[김강선]]·[[천대현]] 등을 프로팀에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다가 2006년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現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2008-09 시즌까지 팀을 지휘하였다. 부임 초창기에는 [[연세대학교]] 시절 제자였던 [[최병훈(농구)|최병훈]]을 매니저로 영입했으며, 마지막이었던 2008-09 시즌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그해 우승팀이었던 [[전주 KCC 이지스|전주 KCC]]를 상대로 5차전까지 끌고가는 등 나름 선전했기에 전자랜드팬들에게는 존재감이 그렇게 크지 않은 편. 본인 말로는 그 무렵 뒤늦게 깨달은 리더십이 전자랜드 감독으로 갔을 때 빛을 발했지만, 또 다시 성적 부진 책임을 지고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존심 상했냐고? 전혀 그렇지 않았다. 프로에선 트레이드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내 의지대로 선수를 스카우트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간을 갖고 차분히 기다렸어야 했는데, 빨리 뭔가를 보여주려고 무리수를 뒀다. 사람은 세월을 잘 만나야 하는데, 나로선 그때 프로 감독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월이 날 배반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 외에도 리즈시절엔 [[차범근]]처럼 초중고 학생들을 상대로 '최희암 농구교실'을 차려 농구 꿈나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