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희암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초등학교 시절 달리기에 소질을 보였으나 [[휘문중]] 시절 당대 장신인 168cm짜리 키가 담임교사의 눈에 띄면서 농구에 입문했다. 다만 실력으로 [[연세대]] 입학을 못하게 되자 [[예비고사]]를 보고 공부로 대학에 입학한 특이하고 드문 케이스이다. [[2016년]] [[2월 5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농구 특기생으로 입학하지 못한 일화를 소개. >“중·고등학교 때 농구를 하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시험 치르고 연대 들어가는 내가 대견했던지 휘문고 감독님은 물론 교장선생님까지 연세대 농구부를 찾아가 최희암이란 애가 입학하면 농구부로 받아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제자가 농구로 대학 진학을 못하게된 데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들의 도움 덕에 1974학번으로 농구부에 입단했다. 그런데 체육특기자로 뽑힌 선수들의 실력은 대단했다. ‘불멸의 가드’로 불린 인창고 박수교, 고교 최고 센터인 용산고 신선우가 내 동기였다. 실력이 뛰어난 동기가 많다 보니 내겐 출전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다. 2학년 때 반짝 활약했지만 1학년 후배들로 신동찬, 박인규 등이 입단하면서 다시 벤치로 물러났다. 당시 국가대표 선수 12명 중 연세대 출신이 6명이나 됐을 정도로 다들 실력이 좋았다. 6명 모두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아마추어 농구지도자로 명성을 날린 딘 스미스 감독으로부터 직접 농구를배운 도널드 휴스턴이란 사람이 연세대 농구부를 찾았다. 이화여대 교환교수로 오신 분인데 학교 측의 주선으로 우리 학교에서 농구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딘 스미스의 농구가 무엇인지, 그가 어떤 기술을 전파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 그 시간이 향후 지도자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동기생 신선우, 박수교, 장봉학과 1년 후배 신동찬, 박인규 등이 모두 대표팀에 나가 있는 동안 학교에 남은 최희암은 딘 스미스에게 농구를 배운 도널드 휴스턴을 만났고, 그로부터 프리징 플레이(freezing play), 페이크 스위치(fake switch), 트래핑 디펜스(trapping defense) 등의 기술을 배우게 됐다. >“그때 농구부에서 통역 가능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그분의 말을 통역하고, 그분이 가르치는 새로운 기술의 농구를 배우면서 농구에 푹 빠져 지냈다. 그때 김영기 감독(현 KBL 회장)과 김인건 코치가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었는데, 연세대 농구부와 세 차례 연습 경기를 했다. 우리로선 주전 멤버들이 모두 대표팀에 나가 있던 터라 2진 선수들을 데리고 연습경기를 치렀는데 휴스턴이 알려준 기술로 경기를 풀어가면서 대표팀을 상대로 한 번 지고, 두 번을 이겨버렸다. 김영기 감독이 얼마나 화가 나고 창피했겠나. 주전도 아닌 후보들이 뛰는 상대한테 두 번이나 졌으니. 나중에 우리한테 다가와선 ‘도대체 그 기술이 뭐야?’라고 물으시더라. 김영기 감독도 그때 처음으로 ‘프리징 게임’ ‘런 앤 점프’ 같은 용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대학 졸업 후 현대에 입단한 최희암은 당시 팀을 이끌던 방열 감독에게 휴스턴으로부터 배운 전술 노트를 모두 건넸다고 한다. >“방열 감독이 연세대 경기를 지켜보신 터라 그 전술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셨다. 그래서 내가 기록해놓은 노트를 모두 드렸다. 딘 스미스 감독이 한국 농구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대학 시절에 농구 실력에서 동기생들인 [[박수교]], [[신선우]] 등에 밀려 출장 기회를 많이 잡지 못했던 그는 1977년, 실업농구팀인 현대 남자 농구단에 입단하여 잠깐 교체멤버로 활동했으나, 선수시절 내내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데다 박수교, 신선우 등 동기들에게 밀려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79년에는 황유하, 이문규, 이종호[* 1983년경부터 22년 간 모교인 [[한양대학교]] 농구부 코치로 일하며 김용근 및 김춘수 감독을 보좌했으며, 2020년 4월 [[http://www.rookie.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494|작고]].], 권경구[* 1981년 은퇴 후 [[건국대학교]] 감독, 한국대학농구연맹 이사, 한국 주니어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한국여자실업농구연맹 사무국장, 태평양 및 외환은행 여자농구단 감독 등지 역임.] 등이 입단하면서 또 후보선수 신세로 전락한 채 해군에 입대했고, 해군 농구단에서조차 마찬가지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해 제대 후 1982년에 [[은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