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훈재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서울영일초, [[중앙중학교(서울)|중앙중]], [[중앙고등학교 야구부|중앙고]] 시절 1983년 13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마산고등학교 야구부|마산고]]를 상대로 3점 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으며, [[단국대학교 야구부|단국대]](1985학번) 시절 1988년 서울올림픽 참가를 위해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1989년 [[MBC 청룡]]에 1차 2순위로 입단했다. 주 포지션은 1루수였지만, 팀의 1루 자리는 최훈재의 입단 전해인 1988년 타격왕을 차지하기도 했던 정상급 교타자인 [[김상훈(1960)|김상훈]]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주전 자리가 쉽게 나지 않았다. 1990년 1월 [[MBC 청룡]]이 럭키금성그룹에 인수되어 [[LG 트윈스]]로 바뀐 후에도 그의 입지는 나아지지 않았고, 1994년 시즌을 앞두고 [[김상훈(1960)|김상훈]]이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자[* 김상훈의 트레이드 맞상대가 바로 [[한대화]]였다. 거기에 해태가 2차 1픽을 했던 [[허문회]]도 함께 LG로 이적했다.] 기회를 잡나 했지만, [[서용빈]]이라는 스타 신인이 [[갑툭튀]]하면서 결국 외야로 밀려나게 된다. 1994년 성적은 1군 90경기를 뛰면서 타율 0.324 6홈런 29타점으로 제법 괜찮았고, 이 해 우승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외야에서도 [[심재학]]과 [[김재현(1975)|김재현(1975)]]에게 밀려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결국 1996 시즌이 끝나고 LG는 해태로부터 [[동봉철]], [[최향남]], [[송유석]][* [[전설의 타이거즈]] 송유석-정회열 편에서 송유석은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의 보복으로 인해 LG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을 받고, 최훈재와 [[조현(1976)|조현]]을 내주는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좌타자에 목말라 있었던 [[해태 타이거즈]]의 [[김응용]] 감독은 그를 중용했고, 그에 보답하듯이 이적하자마자 0.292(팀 내 2위), 12홈런(팀 내 4위) 70타점(팀 내 3위)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시즌 내내 붙박이 3번타자로서 1997년 [[해태 타이거즈]]의 9번째 우승인 [[1997년 한국시리즈]]에 큰 공헌을 한다. [[김성한]]과 [[최해식]]도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최훈재의 합류가 우승에 도움이 됐다고 술회했다.[* 해태는 유난히 LG의 트레이드에서 많이 손해를 보았다. 팀 분위기가 자유분방하던 LG에서 뛰던 선수들이 '''강압적이고 군대같기로 악명 높았던''' 해태로 트레이드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훗날 [[손혁]]이 괜히 해태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최훈재는 비교적 고참급으로서 해태에서 그보다 고참급 선수가 [[이순철]], [[김정수]], [[백인수]], [[조계현]] 정도였고 [[이강철]]과는 동기였다. 그 덕분인지 최훈재는 LG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된 선수들 중 그나마 가장 해태에서의 적응에 성공한 선수였다. --그러면 고참이 딸랑 [[김성한]] 하나였던 [[김상훈(1960)|김상훈]]은?-- 그 후 해태가 KIA로 바뀐 이후 LG에서 KIA로 트레이드된 [[이용규]]와 [[김상현(1980)|김상현]]이 대박터져 이 둘이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당시 최훈재의 분전으로 인해 94년부터 96년까지 [[이종범]]의 출루와 [[홍현우]]의 적시타의 득점루트가 아니면 별다른 효과가 없던 해태 타이거즈의 공격진에 새로운 공격 루트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1998년 시즌은 개막전 광주 OB전 첫 타석에서 [[김상진(1970)|김상진]]을 상대로 그림같은 솔로홈런을 치며 쾌조의 출발을 보인 기세가 무색하게 .264 9홈런 49타점에 그치면서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고,[* 특히 장타율이 3할대까지 떨어지면서 1루와 좌익수에게 기대되는 공격력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자신의 주요 포지션이던 1루와 좌익수의 자리에서 성장세가 두드러진 [[장성호]]와 [[이호준]]에게 밀리게 되면서 시즌이 끝나고 [[권명철]]을 상대로 이재만과 함께 [[두산 베어스]]에 [[트레이드]]됐다.[* 하지만 최훈재의 트레이드 맞상대였던 권명철은 이듬해인 1999 시범경기에서 발목 부상을 당해 그대로 시즌아웃되었고 2000 시즌을 앞두고 신생팀 [[SK 와이번스]]로 재이적했다.] 그 후에 같은 10번을 단 [[양준혁]]이 해태를 오고가면서 많은 잡음을 일으킨 전력이 있어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었을 때 대놓고 트레이드를 거부했고, 우여곡절 끝에 1년간 해태에서 뛴 후에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창설을 주동하였다.], 똑같은 좌타자지만 올드 타이거즈 팬에 있어서는 [[양준혁]]보다 최훈재가 이미지가 좋게 남아 있다. [[두산 베어스]]에서는 나름 지명타자나 좌타 대타로 기용되면서 괜찮은 활약을 보여 주었고,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로써 3개 구단에서 모두 [[우승 반지]]를 껴 본 선수가 되었다. 통산 성적은 0.260 677안타 62홈런 368타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