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홍희 (문단 편집) === 광복 후 태권도의 이름을 만들다 === 1953년 제주도에서 창설된 [[제29보병사단]]의 초대 [[사단장]]으로 부임한 최홍희는, 이곳에 자신의 첫 태권도 교육기관을 만든다. 부대 이름을 '[[태권도]]부대'라고 하고[* 그래서 경례구호도 '태권'이었다. 다만 태권도가 이후(1954)에 작명되었다는 식의 말도 있는거 보면 1953년부터 태권도란 말을 썼다는건지 아니면 이후에 태권도부대라고 명명했다는건지 전후관계가 좀 복잡하긴 하다.]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본인은 광복 전 잠시 배운 [[가라테]]를 중심으로[* 초창기 태권도 원로들은 다수가 가라테 사범 출신이었고, 그 외 소수의 중국권법, 기타 사범들이 협력하여 여러 무술을 연구 통합, 한국식으로 발전시킨게 태권도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최홍희는 이것을 군용무술로 활용한 케이스. 참고로 최홍희 본인은 쇼토칸 가라테 2단이었다.]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반란사건]] 당시 경찰에게 맞고 오던 개판 오분전 상태의 한국군에게 자기 몸을 단련할 수 있는 새로운 무술을 지도할 생각을 했다는 말이 있으며, 저서에 따르면 본인은 [[1946년]] 3월 쯤부터 새로운 무술이 필요하다고 고민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1954년에는 그의 부대가 대통령 앞에서 무술 시범을 보이는데, 이것을 본 [[이승만]]이 "저것이 우리 고유에 내려오던 [[택견|탁견]]이야"라고 말하며[* 사실 가라테를 나름 변형 소화했던 것으로 이승만이 착각한 것이다. 다만 최홍희 본인은 태권도라는 단어를 만든 후 가라테와 구분되는 [[사인웨이브|고유의 색채를 입히고자]] 부단히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관심을 가졌다는 일화가 있다. 최홍희는 본인 부대에 군용도장 '오도관'을[* 최홍희 왈, 오도관의 오도(吾道)는 공자가 '나는 오직 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吾道一以貫之)'라고 말했던 데서 따왔다고 했다. 즉, 태권도의 길을 가겠다는 것.] 설립했는데, 이때 오도관엔 남태희 등 광복 전후 태권도의 기원이 된 이른바 5대관 중 하나였던 '청도관' 출신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사범들과 논의해오던 무술을 더 개량시켜 1950년대 중반 ITF 태권도의 원형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즉, '청도관->오도관->ITF 원형'인 셈. 이후 최홍희 자신은 1955년 정통성 확보 목적 등으로 민간 도장과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청도관에서 2대 관장 손덕성 명의로 명예 4단증도 받는다. 1959년에는 월남에 국군태권도시범단 파견도 한다. 1959년, 민간 도장들과도 통합을 꾀해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고 본인이 초대 회장 자리에 오른다. 다만 이때 일부 민간 도장 사범들은 자신들과 큰 연관도 없는 군인 최홍희에게 제법 반감이 있었고, 이게 얼마 안가 대한태권도협회가 찢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족으로 지금의 WT 대한태권도협회는 최홍희 시절을 지워놔서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부터를 시초로 본다. 근데 1965년 대한태수도협회를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한 것도 최홍희 때라 WTF 입장에선 난감하긴 했을듯. 사실 이종우 등 기존 세력들은 태수도('태'권도+당'수'도)협회의 명칭을 고집했으나, 당시 5대관에서 영향력이 강하던 무덕관의 대변인 김영택이 수박도회와 태수도협회가 통합하는거니 양쪽 명칭보단 먼저 알려진 태권도로 명칭을 개정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면서 최홍희를 도와준다. [[1961년]]에는 [[제6군단]][[군단장|장]]을 역임하였으며[* 참고로 최홍희가 논산훈련소 참모장으로 5.16 당시 후방에 참여했다는 식의 글도 있는데, 정작 다른 글에선 그가 군사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고 오히려 [[박정희]]와 [[쿠데타]] 세력들에게 반감이 많았다는 반대 서술도 있다. 절충식으로 파가 달라 비협조적이었다는 식의 글도 있고 기사마다 제각각이다. 어쨌든 최홍희는 이후 저서에서 "8기생 중령들은 대령도 거치지 않고 졸지에 [[준장]]으로 둔갑하여 격에도 맞지 않는 장군 행세를 하는가 하면 박정희는 전원 군 임무로 돌아간다는 당초의 혁명공약은 아랑곳없이 결국 대통령 자리까지 차지하지 않았는가. 군사정부의 [[독재]]로 얼룩진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의 시초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라고 5.16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962년에 군에서 예편하였다. 참고로 태권도계 전체로 보면, 당시 태권도 보급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청도관에선 발차기를 중심으로 꾸준히 기술을 개발 하였으며 그 결실로 1963년 박종수 원로에 의해 [[뒤돌려차기]][* 참고로 최홍희가 직접 창립한 [[국제태권도연맹|ITF]]에서는 이 기술이 몸의 회전을 이용하여 돌려차기와는 반대 방향으로 돌려찬다면 반대돌려차기, 단순히 상대에게 등을 보이면서 뒤를 찬다면 뒷차찌르기라고 부른다. 태권도가 발기술 위주로 발전하면서 이후 가라테도 태권도의 영향을 받아 좀 더 다양한 킥 기술을 받아들인다.]가 고안되었다. 또한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다른 주요 무관들과 교류전을 갖는 등 매우 의욕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다만 뒤돌려차기의 경우, 초창기에는 "일단 피하거나 앞으로 전진하여 손기술로 제압"하는 대처법이 나와 고전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일화로, 1960년대 초반 뒤돌려차기가 고안된 지 얼마 안되어, 전국 주요 무도관 중 강덕원과 교류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강맹한 위력의 뒤돌려차기에 기가 죽은 학생들이 맥을 못췄지만(당시 강덕원은 지방의 명문 학교와 연계하여 나름 상당한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겨루기가 계속 진행되다 보니 애들 눈에도 "정신차리고 피하면 이길 수 있다"는게 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건 말 그대로 "초창기" 때의 얘기다. 현재는 견제, 기습, 마무리 등 응용법이 많이 고안된 상태다.][* 참고로 강덕원은 [[택견]] 등 여러 무술에 일가견이 있는 [[박철희]] 관장이 운영한 곳으로 앞차기, 안다리걸어차기, 손기술을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다고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타격 순간에 힘을 내는 것을 강조했으며, 특히 실전에서 쓸 수 있도록 팔을 뒤로 빼는 예비동작 없이 바로 뻗는 주먹 또는 수도와, 역시 예비동작이 생략된 빠른 앞차기가 이 강덕원에서 연구한 결과물이다. [[응우옌반티에우|티우]] 월남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지낸 장교 안낙순이 강덕원 출신이며, 예비동작 없는 빠른 주먹을 수련한 사람 중에는 [[권투]]로 전향해 성과를 거둔 이도 나왔다는 후문이 있다.] 1965년 8월에는 3년 간의 집필 끝에 영문으로 된 『태권도교본』(4×6판·364쪽)을 펴냈다. 당시 그는 태권도의 기술연구를 비롯해 명칭과 용어를 제정하기까지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내가 아니면 태권도에 관한 책 하나 쓸 만한 사람이 없느냐"며 태권도계의 인재 부족을 탓하기도 했다. 다만 안티측에선 그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비꼬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