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형우(정치인) (문단 편집) === 정치 활동 ===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김녹영]], [[김한수(1935)|김한수]], [[김상현(1935)|김상현]], [[나석호]], [[김경인]], [[조윤형]], [[조연하]], [[이종남(1919)|이종남]], [[이세규]], [[박종률]], [[강근호]], [[류갑종]] 등과 같이 모 군부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기장군|동래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원규(1925)|김원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이후락]]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6월 신민당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신민당 당기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0년 [[5.17 내란]] 직후 김동영 등과 함께 국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정치규제를 당했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그리고 민주화추진협의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김태호(1935)|김태호]] 후보와 [[민주한국당]] [[심완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미합중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 존 스타인에게 미국을 질책하며 사태가 악화되면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앞에서 [[분신자살]]'''[* 알다시피 광화문 앞에는 '''[[주한미국대사관]]'''이 있다.]까지 하겠다고 선언하여 놀란 지부장이 말릴 정도로 민주주의를 크게 열망했다.[* 리더인 김영삼의 스타일을 닮은 것인지 상도동계는 말보다 행동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형우가 으뜸이었다. 그야말로 우직한 상도동의 행동대장이라고 할만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 [[동래구]] 을(현재의 [[연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0년까지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할 때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가족들과 김영삼의 간곡한 부탁으로 철회, 결국 합당에 참여하게 된다. 그 해부터 1991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동력자원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김동영의 뒤를 이어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정무제1장관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산악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아들의 경원전문대학 부정입학 건으로 바로 사퇴하였다. 같은 해 말부터 1994년 말까지 [[행정안전부장관|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내무부 장관 임기 중인 94년 3월에는 경찰이 소유한 동교동 주택 3채의 매각을 지시했는데, 이 주택은 경찰(치안본부)이 [[김대중]]을 감시하기 위해서 매입한 주택이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연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신한국당의 차기 대권주자인 9룡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될 정도였으나, 결과적으로 대선 경선 출마를 포기하고 신한국당 대표로 내정되어 대선 후보 경선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15대 대통령 선거]] 경선을 앞둔 1997년 3월 11일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것이 정치인 최형우의 마지막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을 독대하여 당대표를 맡는 대신 대권을 포기하라는 말을 듣고 그 다음날 뇌졸중이 왔다는 등의 풍문이 있는데, 최형우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6191/8|#]]] 결국 당 대표는 [[이회창]]이 임명되었고, 최형우는 국회의원직을 유지했지만 건강이 워낙 안 좋았던 탓에 남은 국회의원 임기 3년동안 제대로 된 의정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민주계 내에서 가장 정치적 지분이 컸고 당내 세력도 확고했던 최형우가 사라지면서 신한국당 대선 경선 국면에서 민주계는 [[이인제]], [[김덕룡]]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최형우의 '''친동생''' 최형호는 이회창 후보의 탈YS 노선에 반발하여 신한국당을 탈당, 국민회의에 입당해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한다. 이 일로 인해 잠시 형제 간에 관계가 멀어졌지만 대선 이후 관계를 회복했다. 이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99년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결국 [[이회창]]이 대선 후보가 되었으나 본선에서 패배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