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현배 (문단 편집) == 기타 == [[울산광역시]] [[중구(울산)|중구]] [[동동(울산)|동동]] 613번지에 외솔최현배선생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http://www.oesol.kr/|기념관 누리집]], [[http://blog.junggu.ulsan.kr/5|운영 시간 안내]] 한 때 [[울산 버스 912|912번]] 지선 버스가 여기를 종점으로 삼기도 했지만, [[2013년]]부로 한블럭 아래 병영초등학교 정류장을 거쳐 더 북쪽으로 연장되었다. 또한 [[우정혁신도시]]에는 그의 호를 딴 외솔초등학교와 [[외솔중학교]][* 본래는 울산동중학교로 약사동에서 혁신도시로 이전한 학교이며, [[2016년]]부터 현재의 교명으로 바꿨다.]가 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짐작이 가겠지만, 매우 엄격하고 근엄한 학자였다. 생전에 찍은 다른 사진들만 봐도 웃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 일설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에서 발견되었을 때 큰 소리로 기뻐하며 웃었다고 한다.] 나라와 나랏말을 외세에게 빼앗겼던 경험 때문인지 외솔이 국어학자로서 가지는 사명감은 남달랐으며, 평생토록 극히 엄격한 잣대를 자기 자신과 제자들에게 적용했다. 후배인 문학박사 [[양주동]] 교수는 유머러스한 일화도 많았으며[* 일화가 참 다양하지만 특히 "어이쿠 국보가 넘어진다!"와 "내가 모르는 건 학생들도 몰라도 돼", "(택시기사에게) 국보가 탔으니 안전운전 부탁하오"가 유명.] 아들 최신해 박사는 가끔씩 해학적 면모를 보여주곤 했는데, 외솔은 그런 게 일체 없었다. 그래서인지 연희전문에서 외솔의 지도편달을 받았던 교수들은 옆에서 누가 "최현배"나 "외솔"이란 말을 하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떴다는 소문마저 있었다. [[순우리말]]에 관심이 많아서 국가적으로 순우리말 쓰기 운동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라는 낱말 사용을 강하게 비판한 사람 중 한 명이다. [[3인칭#s-5|그녀]] 항목 참조.] 또한 [[이승만 정부]] 시절 [[1955년]] [[조선일보]]에 [[서울]]이란 이름은 수도 이름으로 맞지 않으므로[* 서울이란 말 자체가 수도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수도 이름이 '수도'라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게 이 주장의 근거다. 원문은 [[1955년]] [[9월 22일]]자 조선일보 논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꿔야 한다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이승만]]도 이것에 관심을 보여서 바꾸려고 논의는 했는데, 이승만 밑의 참모진들이 이승만의 호인 '우남'으로 바꾸자고 하는 통에 최현배 선생이 지금 장난치냐고 분노했으며 야당이 결사반대하고 [[김형민(정치인)|김형민]] 초대 [[서울시장]]도 '서울'이라는 이름을 강하게 주장하여 '서울'이란 이름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자세한 건 [[서울특별시/역사#s-3.2]] 참고.[* 참고로 이승만 본인조차 대놓고 아부하는 뉘앙스가 강한 '우남'이란 이름을 붙이는 걸 원치 않아했다. 그래놓고 탑골공원에 살아있는 자신의 동상을 큼직하게 세운 탓에 우상화라는 비난을 받았고 4.19 이후 동상이 박살났지만...] [[20세기]]에 연세대학교(연희전문의 후신)에 다닌 사람이라면 외솔의 영향으로 당시 학교 곳곳에 남아있던 순우리말 사용의 흔적을 보고 다소 의아했을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연세대학교의 [[주차장]]은 20세기 말까지도 “둠”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으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은 해부학을 비롯한 의학용어의 순우리말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정인혁 교수의 “의학용어집”이 대표적인 예. 우리말의 [[가로쓰기]]는 최현배 박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소위 식자들은 세로쓰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가로쓰기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세로쓰기의 잔재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법조문이나 공문에서 흔히 보는 낫표(「」,『』)가 바로 세로쓰기용 문장부호이다.] 최현배 박사가 아니면 이들의 반발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세로쓰기를 사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글 [[풀어쓰기]] 및 이를 편하게 쓰기 위한 글씨체를 고안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풀어쓰기' 문서 참조. 사후에 그를 기리는 단체인 외솔회가 출범하였고 이 단체에서는 매년 그의 호를 딴 외솔상을 시상한다. 호인 외솔은 보기 드문 순우리말 호인 동시에 최현배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하는 멋진 호로 이름높다. 한국 [[정신건강의학과]]의 원로 의사이자 [[수필가]]로도 유명했던 최신해 박사(崔臣海, 1919-1991)가 그의 아들이다. 외솔의 아들답게 글솜씨가 뛰어났다. 말년에 역사책에 나오는 [[한국인]]의 여러 성문화를 다룬 책을 집필했는데, 근엄한 노교수답지 않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속하다 느낄 정도로 해학적이고 맛깔나는 문체가 일품이다. 최신해 박사는 [[이비인후과]] 전문의인데, 전공을 살려 한글과 인간 발성기관 구조 간의 관계를 연구하기도 했다.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 시절 스승으로, 윤동주는 외솔을 매우 존경하여 강의를 수강하고 그의 저서를[* <우리말본>, [[1937년]].] 탐독했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의 시는 거의 전부 [[순우리말]]로 되어 있다. 그의 고향인 [[울산광역시]]에서는 매년 그와 관련된 글짓기 행사가 열리는 등 울산광역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존경받는 이 학자를 매우 자랑스러워 한다. 한글학회 이사장을 별세 때까지 맡았고, 이후 제자였던 허웅이 32년간 한글학회 이사장을 맡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