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현배 (문단 편집) == 생애 == [[1894년]] [[10월 19일]] [[경상도]] [[울산광역시|울산도호부]] 내상면 [[동동(울산)|동동리]](現 [[울산광역시]] [[중구(울산)|중구]] [[동동(울산)|동동]])에서 아버지 최병수(崔炳壽)와 어머니 박순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울산군 병영성 내부에 살았으며,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행촌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46-1번지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750&evntId=0034982147&evntdowngbn=Y&indpnId=000001378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거주했다]]. 출생 이후 병영성 내부에서 살면서 [[병영초등학교|일신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뒤 상경하여 [[경기고등학교|경성고등보통학교]][* 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학생 시절 한힌샘 [[주시경]]을 처음으로 만나 조선어학강습원에서 [[국어국문학|국어학]] 및 [[국어문법]] 등을 이수하였다.[* 이곳에서 받은 '익힘,,에,,주,,는,,글'(중등과정 수료증)과 [[풀어쓰기]]로 적힌 '맞힌보람'(고등과정 졸업장)의 [[스캔본#8-2|영인본]]들이 외솔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를 거쳐 [[히로시마]](廣島)에 있는 [[히로시마대학|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현 [[히로시마대학]]]에 [[한국인]] 학생으로 입학하여 졸업했다. 이때 중학교 교사 자격증을 받았으나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여 고향인 [[울산]]으로 귀향한 후 조선인 상권확보의 목적으로 공동상회를 설립하였다. [[1920년]]에는 [[경상남도]] [[동래|동래군]][* 현재의 [[부산광역시]] 일대에 해당한다.]으로 내려가 부산에 있는 [[동래고등학교|동래고등보통학교]][* 현 [[동래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임하였으며 [[1922년]]에 [[교토]](京都)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하고 [[1925년]]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해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수학하였다.[* 석사학위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일본 제국]] 시절에는 석사 학위의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1922년]]에 교토제대에 입학해 [[1925년]]에 졸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일본이 석사학위가 없었던 1950년대 이전에는 학사학위가 석사학위를 대체하는 학위였다.지금은 학사 학위가 흔하지만 그 시대에는 학사 학위 가지고 교사나 대학교수가 될 정도로 석사와 비슷한 학위였고 1920년대 이전 까지는 박사학위는 [[문부성]]에서 수여하였지만 1920년대 학위법 제정으로 일반 대학에서도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 석사학위가 도입된 것은 1950년대였으며 석사 학위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잔재가 아직도 남아 석사 대신 '박사 전기과정'이라는 표현을 쓰는 대학들도 많다.] [[1926년]]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맡았다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이 터지면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30년]]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제정 사업에 같은 [[주시경]] 학파인 [[권덕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63606|신명균]](申明均),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74&docId=578992&categoryId=46674|심의린]](沈宜麟),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321063&categoryId=34328|정열모]](鄭烈模)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로써 교육을 포함한 [[일본 제국]]의 공적인 영역에서 주시경 학파의 형태주의 맞춤법이 표준이 되었다. 일본 제국의 이 사업은 주시경 학파가 주장하는 형태주의 맞춤법이 박승빈 학파가 주장하는 표음주의 맞춤법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 사업에 참여하여 한글보급에 힘써 왔고, [[미국인]] 학자 겸 선교사인 조지 매큔과 에드윈 라이샤워가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만들 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군|홍원]]경찰서에 검거, 구금되었고, 1943년 9월 함흥형무소에 이감되었다. 그 뒤 공판에 회부되어 1945년 1월 16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공소가 기각되었고, 상고까지 했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참고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750&evntId=0034982147&evntdowngbn=Y&indpnId=000001378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해당 판결문]]을 보면 창씨명이 쓰키나리 겐바이(月成鉉培)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성씨만 새로 만들었고 이름은 그대로 둔 채 한자 읽는 방식만 바꾼 것이다. 이후 [[8.15 광복]]이 되면서 석방되었다. 광복 직후 최초 정치 여론조사에서 7위를 했다. 울산 출신이 이관술과 최현배 두 명이나 있다. ||<-3>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br]-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 || || 순위 || 이름 || 득표율 || || 1위 || [[여운형]] || 33% || || 2위 || [[이승만]] || 21% || || 3위 || [[김구]] || 18% || || 4위 || [[박헌영]] || 16% || || 5위 || [[이관술]] || 12% || || 6위 || [[김일성]] || 9% || || 7위 || '''최현배''' || 7% || || 8위 || [[김규식]] || 6% || || 9위 || [[서재필]] || 5% || || 10위 || [[홍남표(1889)|홍남표]] || 5% || ||<-3> {{{-2 백분율의 합이 100%를 넘는 것은 복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임[[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16816107&navType=by|출처]]}}} || 해방 이후는 [[미군정청]] 편수국장이 되어서 [[국어(교과)|국어]] 교과서 행정을 담당하였고 [[미군정]]의 자문기관이던 조선교육심의회의 전체회의에서 교과서와 공문서의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통과시켰다. 후에 한글학회 상무이사와 이사장을 겸임하였다. 특히 [[194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 공인 로마자 표기법인 '한글을 로오마자로 적는 법'과 [[외래어 표기법]]인 '들온말 적기법'을 제정하는데 그의 이론이 반영되었다. [[1951년]]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으로 [[문교부]] 편수국장을 맡았다. 한편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역사|울산군]] 을 [[선거구]][* [[울산광역시|울산군]] [[농소동|농소면]], [[북구(울산광역시)#강동동|강동면]], [[온양읍|온양면]], [[웅촌면]], [[범서읍|범서면]], [[두동면]], [[두서면]], [[언양읍|언양면]], [[상북면(울주)|상북면]], [[삼남읍|삼남면]]]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택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휴전 후인 [[1954년]] [[서울특별시]]로 돌아오게 되면서 [[연희대학교]]로 복직하여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고 이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문과대학]]장, 부총장을 맡았으며 [[1958년]]에 학술원 부원장이 되었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를 받았으며, [[1959년]]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하였다. [[연세대학교]]는 [[2001년]] 문과대학 건물(구 인문관)을 그의 호를 딴 "외솔관"으로 명명하였다.[* 참고로 신관인 제2인문관은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으로 연희전문을 한국학의 메카로 이끈 [[정인보]]의 호를 딴 "위당관"으로 명명했다.] [[1962년]] 생존인물로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받았으며, [[1970년]] 노환으로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유해는 원래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었던 주시경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가 1981년 주시경의 묘는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최현배의 묘는 2009년 9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