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현(북한) (문단 편집) === [[6.25 전쟁]] === 광복 이후 김일성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온 다음 1948년 7월, 내무성 산하 38선 경비여단, 즉 제3경비여단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12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강건(북한)|강건]], [[김광협]], [[김달삼]], [[김웅(1912)|김웅]], [[김일(1910)|김일]], 전태룡, [[최용진]], [[김무정|무정]], [[박달]], [[박훈일]], [[최광]], [[김경석]]과 함께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남침을 준비하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옹진반도 침공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6.25 전쟁]]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6월 26일 16시경에 대한민국 국군 17연대의 주력부대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없이 최현의 눈 앞에서 배를 타고 최현 부대의 포사격을 받으며 후퇴하였다.] 6월 27일, 최현 부대는 [[해주]]에 진입하였다. 그 후 [[개성시|개성]]과 문산을 거쳐 이렇다 할 전투 없이 6월 29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林隱, '(북조선 창설 주역이 쓴) 김일성 왕조' (沃村文化社, 1989), pp.214-215 참조.] 7월에는 김일성에 의해 38선 경비여단장에서 조선인민군 제2사단장(☆)으로 영전했다. 인민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달성됐으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이에 격분한 김일성은 제2군단장([[김광협]])과 그 예하의 제2사단장, 제12사단장을 보직해임하여[* 김일성은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다.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쉽게 설명하면 군단장(☆☆☆)을 참모장(☆)으로 강등, 사단장(☆☆)을 여단장(***)으로 강등시킨 것과 비슷하다.] 제2사단장이라는 고위직책이 그에게 돌아왔다. 사실 인민군 2사단의 본래 계획은 춘천 방면을 빠르게 돌파한 뒤 서울 남측의 [[이천시|이천]]-[[수원시|수원]] 방면으로 신속히 기동해 국군의 배후를 차단, 포위섬멸을 완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었다. 게다가 이들은 [[팔로군]]에서 인계받은 부대 정도를 제외하고 인민군 내에서 가장 정예부대라 김일성의 기대도 컸었다. 하지만 이들이 첫 전투인 [[춘천 전투]]에서 전멸당함으로서 계획이 틀어졌고 이에 사단장이 이청송 소장에서 최현으로 교체됐는데, 당시 그의 나이 겨우 43세였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나이에 비해 높은 직위에 올랐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북한군은 건군 초기인지라 [[리학구|20대 후반의 사단 참모장]], [[강건(북한)|30대 초반의 총참모장]], [[방호산|30대 중반의 군단장]] 등, 직급에 비해 나이가 많지는 않은 고위 군관들이 꽤 있는 군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젊은 나이의 고위 장교들이 있는 현상은 똑같이 건군된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한민국 국군]]도 마찬가지였다. [[김종오|20대 후반의 사단장]]이라던가, [[백선엽|30대 초반의 4성 장군]]이라던가...][* 참고로 이 당시에 김광협의 후임으로 제2군단장에 임명된 사람이 김일성의 라이벌 중 한명이었던 [[김무정]]이다.] 사단장이 된 최현은 재정비를 마친 2사단을 이끌고 꾸역꾸역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진천 전투|진천에서 김석원 준장이 이끄는 수도사단을 만나 진격이 일주일 가량 지체되었고]] 이에 '''"또 그 놈과 만나 이 꼴이 됐군, 그 놈은 교묘히 병사들을 휘어잡는단 말이야."'''라며 불평하였다고 한다.[* 이 둘은 6.25 전쟁 발발 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도 각자 사단장으로 맞붙은 적이 있었다. 자세한 건 [[육탄10용사]] 참조.] 그래도 사단장 직책을 유지한 채 부대 이동과 정비를 마친 8월 중순부터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고, 8월 31일에는 [[창녕]]과 [[영산]] 방면에서 낙동강을 강행도하하여 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고, 공세종말점을 지나 한계에 다다른 인민군은 배후가 차단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속도로 와해되어 제각기 패주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최현은 잔존병력을 규합해 '''유엔군의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시간을 벌었다. 한편 주력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자 멘붕에 빠져 있었던 김일성[* 최고사령관인 자신만이 내릴 수 있었던 후퇴명령조차 제때 내리지 않고 남들보다 먼저 도망칠 정도로 혼이 나가 있었고, 스탈린에게 찍혀서 시베리아로 유형갈 생각까지 했다고 했을 정도.]은 최현이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유엔군의 추격을 조금씩 지연시키자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6.25 전쟁 당시 북한의 장군들 중에서 [[연안파]]가 아닌 동북항일연군 출신(김일성 직계)으로서는 그나마 가장 활약한 인물이었던 셈.[*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장군은 [[방호산]], [[김무정]] 등의 연안파나 [[남일]] 등의 소련파가 대부분이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 중에 그나마 유능한 인물로 [[김책]]이 있긴 있었으나 1951년에 일찍 죽어버렸다.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최현보다 7살 연상인 [[최용건]]은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었는데 남침을 반대했던 탓에 초기 작전수행은 김책이 주도했다. [[김광협]]도 동북항일연군 출신이었으나, 위에 서술한 것처럼 전쟁 초기에 제2군단장으로서 심각한 무능을 드러내어 김일성에게 빅엿을 먹였다. ~~군사교육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기껏해야 중대급 비정규전 밖에 지휘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한테 군단급 제대 지휘를 바라는 것부터가 도둑놈 심보다~~] 그 덕분인지 1950년 11월에는 [[김무정]]을 몰아내고 제2군단장(☆☆) 자리를 꿰찼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침없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