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태원(야구) (문단 편집) === [[SK 와이번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ksports.net/Large_2001061223143628067_242.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최태원에게 칼 립켄 주니어와 기누가사의 사인이 담긴 대형 사인볼을 선물하는 안용태.jpg|width=100%]] [[파일:100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달성한 최태원.jpg|width=100%]]}}} || |||| {{{#fff '''100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운 최태원'''}}} || [[https://m.sports.naver.com/kbo40/history/22|히스토리 21 최태원, 1009경기 연속 출장 '불멸의 천일야화']] 팀이 SK로 바뀐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출장하는 경기마다 신기록 갱신이었는데 2002년 8월 23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1,000경기 연속출장 기록을 세웠고 2002년 9월 8일 [[현대 유니콘스]]전을 끝으로 기록이 마감됐다. 사실 최태원의 연속출장은 기록 후반기에는 부진한데도 대타나 대수비 등의 방식으로 경기 막판에 교체되어 투입되는 등 사실상 기록을 위한 출전[* 일본에서도 [[한신 타이거스]]의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막판에는 이런 식으로 연속경기 및 연속이닝 출장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지명타자]]가 없는 [[센트럴 리그]] 특성상 가네모토의 한 자리를 위해 다른 누군가는 영향을 받아야만 했다.]으로 기록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2000년까지는 규정타석을 채웠고 2001년에도 비교적 괜찮았지만, 2002년에 이르자 선수가 부진한데도 기록을 위한 출전을 하고 있다는 시선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는 최상의 멤버로 운영해야할 팀의 전력에 구멍을 내는 일이므로, 당시 [[강병철]] 감독은 언제 이 기록을 끝내야 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1,000경기 연속출장 기록을 세운 뒤[* 위에서 설명했듯이 기록정정이 있기 전이라 실제론 995경기. 어쨌든 이후에도 더 출전한 덕에 1,000경기 연속 출장은 달성했다.] 최태원에게 언제 기록을 종료하면 좋을 지 결심하라고 제안했고 최태원이 감독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자 14경기를 더 출전시킨 후 '''감독이 기록을 끝냈다.''' 이 무렵에는 부진 때문에 1,000경기 이후의 경기들은 주로 8회나 9회에 대타, 대수비로 출전해 기록을 간신히 이어나가고 있었다.[* 심지어 2002년 8월 25일 [[두산 베어스]]전에서는 9회말 대타로 등장해 겨우 1,002경기 연속출장 기록을 이어갔을 정도. 최태원도 이 경기 이후로는 기록 중단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이 중단된 경기는 2002년 9월 9일 [[LG 트윈스]]전으로 8회까지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신언호]] 코치가 벤치에 있던 최태원에게 오늘은 출장이 어렵겠다고 통보했다고. 당시 최태원의 포지션 경쟁자였던 [[정경배]]는 9회가 됐는데 자신을 교체하지 않아 놀랐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즌 기록은 최태원이 정경배보다 나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기록이 막상 끝나자 최태원은 눈물을 펑펑 쏟았는데 최태원의 말로는 강제로 기록이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 감독에 대한 서운함과 미안함 등의 감정 등으로 복잡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식으로 연명하듯 출전해서 만든 기록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봐야겠지만 어쨌든 최태원의 기록은 대기록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기록 후반기의 상황 때문에 스타일이 구겨졌지만 1,009경기 전체를 놓고 보면 '''95% 이상은 선발 출전'''한 경기들이다. 최태원 이전에 606경기 연속출장 기록을 만들었던 [[김인식(1953)|김인식]](前 MBC 선수)도 후반기에는 그런 식으로 기록을 업데이트했다. 대기록이 중단되면서 선수 생활의 동력을 잃었던 것인지 이듬해인 2003년, 33세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했으며[* 마지막 시즌은 자신을 위해 도와준 선수단, 코치, 감독들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 1군 엔트리에서 빠졌지만 선수단과 같이 동행하였다고 한다.] 2004 시즌 페넌트레이스 홈 개막전이었던 4월 4일 [[https://sports.chosun.com/news/news_o2.htm?name=/news/sports/200404/20040405/44e02206.htm|은퇴식]]을 치뤘다.[[인천 SSG 랜더스필드|문학 야구장]]에는 그의 연속출장 기록이 적혀져 있다. 이와 관련해 1,00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달성했을 때 [[칼 립켄 주니어]]가 영상 메세지를 보내서 격려하기도 했다. 참고로 최태원의 연속출장 기록 다음으로는 [[김형석(야구)|김형석]]의 622경기[* 1994년 9월 4일 군산 [[쌍방울 레이더스]]전 패배 직후 [[윤동균]] 감독의 체벌 위협에 반발하여 [[OB 베어스 항명파동|팀을 이탈하면서]] 기록이 끊어졌다.], [[황재균]]의 618경기[* 2016년 4월 30일 발가락 미세골절로 1군에서 제외되면서 기록이 끊어졌다.], [[이범호]]의 615경기[* 경기 후반에 들어올 예정이었으나 [[KIA 타이거즈/2008년/6월/4일|강우콜드로 인해 교체되지 못해]] 기록이 끊어졌다.], 김인식의 606경기, [[홍현우]]의 574경기, [[양준혁]]의 547경기, [[이승엽]]의 497경기로 이어진다. 2020년 기준으로 현역 선수 중에서는 [[박해민]]이 448경기 연속출장으로 기록에 도전하고 있었으나 타격 부진으로 5월 24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엔트리에 들지 못하며 기록이 끊어졌다. 따라서 최태원의 기록은 앞으로도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여담으로 프로 첫 안타는 1993년 4월 18일 광주 해태전에서 기록했으며 이것이 쌍방울이 해태를 상대로 광주 13연패를 끊는 결승 투런 홈런이 되었다. 1,200경기를 넘게 출전했음에도 통산 홈런이 24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전형적인 컨택형 타자.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로 선수생활 초반에는 빠른 발로 20도루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 노릴 수 있던 기량이라 본인이 홈런만 좀 어떻게 하면 [[20-20]]은 매년 달성했을텐데 라는 푸념을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코치가 '''"20-20이 별거냐. 1년에 홈런 1개식 20년을 치면 그게 20-20이지."'''라는 드립으로 선수단과 기자단을 박장대소로 몰아넣은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 시즌까지 최태원은 정말로 매년 홈런 1개씩을 치고 있어서 기록 달성의 가능성을 높였으나 5년차인 1997 시즌 홈런 2개를 치면서 기록 달성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물론 나이가 들며 대부분의 타자들이 그렇듯 주력이 줄어드는 대신 근력을 늘려, 한 시즌 5개 정도는 쳐 줄 수 있을 정도로 파워가 늘었고, 위에 쓰여 있듯이 통산 20-20은 결국 달성해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0326133643_11.jpg|width=100%]]}}} || [[SK 와이번스]] 소속으로 오랜 기간 뛰지는 못했지만 [[쌍방울 레이더스]] 때부터 이어진 원클럽 플레이어였기에 은퇴 후 현역 시절 입었던 유니폼과 기념구가 [[인천 SSG 랜더스필드]] 안에 위치한 L's 갤러리[* 전신팀인 [[SK 와이번스]]부터 이어저 오는 구단 역사관으로 인천야구의 변천사와 SK 와이번스 히스토리, 레전드 플레이어존 및 우승 트러피 등이 전시되어 있다.] 레전드 플레이어 존에 진열되어 2022년 박물관이 폐관될 때까지 전시됐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