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충헌 (문단 편집) === 말년 === 1218년 1월에 낭장 김덕명이 풍수에 따라 선왕 강종의 능을 개장하는 것을 고하자 명령을 내려 날짜를 받으려고 했다. 사천대(司天臺)가 의심하여 점을 치지 않자 판사 최계량을 고란도로 귀양을 보냈으며, 이어서 대장군 이부를 섬으로 귀양보냈다. 고종이 아들인 장군 [[최향(고려)|최향]] 및 장군 신선주, 장군 기윤위, 장군 박세통, 장군 최준문 등에게 쌀, 명주, 비단 등을 주자 군사들을 모아 주었는데 기윤위의 군졸이 이유없이 고함을 질렀다는 이유로 자기 마음대로 명령하여 주는 것을 중지시켰다. 옛부터 도목정[* 매년 행하는 인사행정.]은 연말에 하는 것이었는데 전쟁 때문에 돈으로 벼슬을 구하는 자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거란군을 핑계로 날짜를 미루었다. 1218년 정월에 도목정을 열고 뇌물을 받아 벼슬을 주었으며, 거짓으로 늙었다는 이유로 정사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것을 고종이 그 뜻을 알아채고, 궤장을 주고 나와서 정사를 보게 했다. 아들인 최우를 시켜서 사졸들에게 자신을 호위하게 했으며, [[대집성]] 등 5인을 차장군으로 삼았다. 그러나 대집성은 거느리는 군사가 없었기 때문에 [[승려]], 노예를 불문하고 군사가 되는 것을 허락하여 크게 요란하자 이를 듣고 노하여 관직을 빼앗았다. 1219년 3월에 고종으로부터 국성인 왕씨 성을 하사받았고, 때마침 [[조충(고려)|조충]]과 [[김취려]]가 [[거란]]을 [[강동성 전투|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최충헌은 이를 시기하여 군공을 논하는 것을 주관하여 공이 있는 자인 조충과 김취려에게 상을 주지 않았다. 6월에 낭장 기인보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다 들통나자 그의 목숨을 뺴앗았으며, 7월에 조충과 김취려에게 상을 주지 않은 것 때문에 교위 손영 등 10명이 탄식하고, 주위 사람이 이를 고하자 격분하여 이들을 잡아죽이며 동류 100여명도 잡아다 보정문 밖에서 처형시켰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1219년 9월,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을 비웃기라라도 하듯 최충헌은 71세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그는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자 왕씨 성을 되돌려 주면서 죽기 전에 고종에게 궤장(几杖)을 반납하고, 죄수들을 풀어주는 선행을 베풀었지만 큰 틀에서 나라가 달라진 건 없었으며, 죽을 때는 저택에서 하루 종일 풍악을 울리게 하고는 노래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임자일에 달이 화성을 침범하였다. 일관이 아뢰기를 "귀인이 죽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최충헌이 그 말을 듣고 악공 수십 인을 소집하여 종일 음악을 연주하였다. 밤 삼고에 이르러 연주를 마치기 전에 최충헌이 과연 죽었다. 시호를 경성이라 하였다. 백관은 소복을 입고 모여 장례를 치렀다. 비기와 우보, 고취, 기상이 모두 왕의 상과 비슷하였다. >---- >《고려사절요》 고종 6년(1219) 9월 20일 한편, 최충헌은 그의 치밀한 성격을 죽기 직전에도 잘 보여줬는데, 그는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을 직감하고, 아들 [[최우]]를 불러서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반드시 불순한 모의를 하려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너는 오늘부터 문병을 끊어라. 나는 죽을 때까지 너를 결코 부르지 않겠다'''." 는 말을 남겼고 최우는 그렇게 하기로 했으며, 손녀사위인 [[김약선]]에게 자신을 문병하게 했다. >최충헌이 병이 나자, 표문을 올려 관직과 사성을 사양하였다. 은밀하게 아들 최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병이 들어 장차 일어나지 못하면 형제간의 다툼이 있을까 염려스럽다. 너는 다시 오지 말라." 라고 하였다. (...) 최충헌이 병이 들자 네 사람이 모의하기를 "공께서 만약 세상을 떠나시면 우리들은 반드시 최우에게 가루가 될 것이다. 막내아들 최향은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니, 큰일을 맡길 만하다. 최우가 병문안할 때를 노려 그를 제거하려 한다." 라고 하였다. 최우에게 사람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영공께서 병환이 위독하여 급히 공을 보려고 하십니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두 세번 하니 최우가 더욱 의심하여 가지 않았다. >---- >《고려사절요》고종 6년(1219) 9월 최충헌의 말대로 그가 위독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반란 음모가 싹텄고, 그 중에 최준문이라는 이가 있었다. 최충헌의 노비 동화가 마을 사람들과 많이 사통하자 이를 희롱하면서 "누구를 남편으로 삼을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공생 최준문을 얘기하니 그를 종으로 부리다가 대정에 제수했고, 대장군에 이르러 최충헌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총애받은 대장군 최준문과 함께 상장군 지윤심, 장군 유송절, 낭장 김덕명 등은 자신들이 최우에게 숙청될 것이라 여겨 최우가 최충헌의 문병을 오는 틈을 타서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최우가 부친이 위중한데도 문병 한 번 오지 않자 김덕명이 최우에게 이 계획을 발설했으며, 이를 모른 음모자들은 최우를 찾아가서 그에게 >"아버님께서 위중하셔서 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라는 전갈을 전했다. 최우는 대뜸 '''최준문, 지윤심, 유송절을 체포하여 먼 섬으로 보내어 도중에 최준문을 죽여버렸는데''', 이는 앞에 나온 부친 최충헌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에 한 일로 죽은 뒤의 일까지도 생각했던 최충헌의 치밀함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다만 권력을 두고 최우와 최향간의 사이가 나빠서 어떻게든 중재를 해서 좋게 하려고 했지만 형제관계가 좋아지지가 않았고 이 문제로 말년까지 골치아파했다. 결국 그가 죽고 나서 최향이 형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여 홍주(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로 귀양가고 귀양지에서도 반란을 일으키다가 진압당하고 감옥에서 사망하게 된다. 3명의 부인을 두었고 자식으로는 5남 1녀가 있는데 상장군 송청의 딸과 결혼하여 얻은 아들 최우, 최향, 딸 1명인 2남 1녀가 있고, 임씨에게서 최성, 왕씨에게서는 최구와 아들인 2남을 두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