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종학 (문단 편집) === 북한 시절 === 그러던 중 아들 최 아파나시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이 창건되면서 1946년 2월, 군으로 차출되어 2사단 정치부장 겸 부사단장으로 일하다가 1948년 1사단 정치부장 겸 부사단장이 되었다고 하는데 발굴된 소련 문서고에 따르면 군사정치학교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1949년 2월 7일,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선사령부 정치부장에 임명, 전선이 확장됨에 따라 1950년 12월, 동부전선 군사위원에 임명되었다. 계속된 고지전으로 인해 인민군의 기강은 무너져가고 있었는데, 음주, 도박, 민간인 강간이 판을 쳤고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교육, 문화사업을 실시했다. 1953년 3월, 평안남도 당위원장으로 이임한 김재욱의 뒤를 이어 신임 총정치국장에 임명되어 김철우에게 동부전선 군사위원직을 인계했다. 최종학은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의 사상문제를 다잡기 위해 검열위원회를 조직하고 중대 단위까지 총화, 교양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예술사업을 장려하는 한편, 소련, 중국, 몽골, 동유럽과의 교류사업도 전개했으며 인민군이 민청, 여맹과 계속 교류하도록 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대장까지 진급했으나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이 군내 선전까지 장악하고 김일성 우상화를 실시하면서 밀려나기 시작한다. 연안계인 김창만은 고려인들과 사이가 아주 나빴는데 김창만은 자신의 부인이 최종학과 친구였다는 것을 모두 불편해하면서 최종학을 예의주시했고 이 때문에 최종학에 대한 개인적 정보를 많이 입수했다고 한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받았다. 최종학은 1955년 2월, 인민군 창건 7주년 보고에서 인민군의 정통성을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에 있다고 하는 등 김일성 우상화에도 어느 정도 참여했다. 1956년 4월, 3기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법제위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현(북한)|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북한)|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1917)|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영광은 거기까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