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재형(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생애 == 최재형은 1860년 8월 15일 [[함경도]] 경원도호부(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가난한 소작농 아버지 최홍백(崔弘百)[* 전주최씨 평도공이란 주장이 있지만 최재형과 그의 아버지가 오래 전에 우리나라를 떠난 탓에 그 이름이 적혀 있는 족보가 실제로 남아있지 않아서 국가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최재형의 후손이 실제가 아니라면 알리 없는 전주 최씨라고 가문의 이름을 남겼고, 이후 기록을 대조한 결과 전주 최씨 종중에서는 2023년에 최재형을 실제 전주최씨라 어느 정도 인정한 상황이다.]과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당시 천하게 여겼던 기생인지라, 노비의 아들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집안 자체는 그저 가난한 농민 집안이었다. 이후 9살 되던 1869년 고향 경원도호부를 비롯한 [[두만강]] 부근 [[6진]] 지방에 큰 [[흉년]] 및 [[기근]]이 닥치자, 그해 가을 아버지, 형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청나라]] [[지린성|길림장군]] [[훈춘시|혼춘부도통함협령]](琿春副都統銜協領)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地新墟)[* 현재의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하산(러시아)|하산]]에 위치. 1863년 겨울 [[함경도]] [[무산군|무산도호부]](현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의 최운보(崔運寶)와 [[경흥도호부]](현 [[함경북도]] [[경흥군]]) 출신의 양응범(梁應範)이 13호의 조선인을 이끌고 개척한 조선인 마을이다.]에 정착했다. 그 뒤 11살 되던 1871년, 최재형은 형수의 차별 대우와 자신에 대한 증오 등을 이유로 2명의 친구들과 함께 가출을 했다. 그러나 2명의 친구들은 두려움으로 도중에 포기했고, 최재형은 혼자 정처 없이 무작정 걷다가 정신을 잃고 해변가에 쓰러졌다. 이때 그를 발견한 러시아 [[상선]] 선원들의 구조로 러시아 상선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상선 선장으로부터 선원으로서 심부름하며 일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고, 선장 내외가 [[대부]]·[[대모]]가 되어 [[러시아정교회]]식의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의 러시아식 이름과 부칭인 '표트르 세묘노비치'는 당시 그를 도와 준 선장의 이름을 따른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 [[상선]] 선장의 도움으로 러시아에서 교육받은 최초 [[조선]]인이기도 했다. 하급 선원, 무기 공장 노동자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00년대 초 [[러일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큰 돈을 벌어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성실하고 유능해 많은 [[러시아인]]이 최재형에게 통역, 도로·막사 공사 하청, 식료품 등 군납을 맡겼다.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치면서 한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내륙의 한인에겐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 가능하게끔 했고 슬라뱐카 등 해안가 한인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그런 최재형을 러시아 정부는 도헌 즉 지방정부 시장으로 추천했고 연추 읍민들은 적극 환영했다.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이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회고했을 정도. 동포의 권익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위해 최재형은 무장 투쟁의 정신상 지주이자 자금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08년 최재형은 국외 최대 독립운동단체인 동의회를 세우고 총장으로 취임했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내놓은 13,000루블, 이위종의 부친(前 러시아 공사 이범진)이 전해온 10,000루블, 최재형과 안중근이 모금한 6,000루블을 기금으로, 6월 총대장 이범윤에 안중근을 참모 중장으로 한 연추 의병을 창설했다. 연추 의병은 7월부터 국내의 홍범도부대 등과 연합작전을 펼쳐 접경 지역의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9월 안중근의 실수로 영산 전투에서 대패했다. 영산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 최재형은 재정난 탓에 폐간되었던 〈大東共報(대동공보)〉를 인수해 재발행해 격렬한 논조로써 일본제국을 비판하고 한인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면서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과의 [[이토 히로부미]] 살해 거사도 최재형의 후원으로 성사됐다. 이것을 두고 안중근이 자신의 상관이자 조선 8도 독립운동을 총괄한다고 주장한 [[김두성]]이 최재형이라고 본다. 한국 강제 병합 이후 러시아는 항일 운동을 더욱 강하게 탄압했고 〈대동공보〉도 폐지되었다. 당시 연해주는 망명한 독립 지사의 집결지였는데 최재형은 점진적인 온건 투쟁 노선으로 변화를 꾀하며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최대 한인 단체인 권업회를 꾸리게 된다. 최재형은 권업회의 발기회 회장을 맡았고, 발기회 부회장으로는 [[홍범도]]가 참가한다. 이후 12월 권업회 정식 출범 때 최재형이 사실상의 초대 회장이 된다. 물론 권업회 의장으로는 당시 역시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이상설]]이 추대된다. 이 권업회는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출범하며 국외에서 가장 먼저 정부 조직을 꾸린 단체가 된다. 하지만 1914년 6월 제1차 세계대전을 치루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일본의 동맹국이 되면서 결국 권업회는 해산되고 만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일본의 요구로 인해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고 결국 1916년 7월 최재형은 러시아 당국에게 체포되어 [[우스리스크]]로 압송된다. 다만 최재형은 다행히 우스리크스에서 영향력이 강했던 그의 첫째 사위의 덕을 보며 석방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러시아 국내의 상황이 바뀌게 되자 최재형의 경우 일본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게 되면서 자동적으로 적군 편에 서게 된다. 이후 역사를 보면 알다시피 연해주 일대는 일본군이 중심이 된 백군과 적군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기 때문에 최재형 역시 자주 거처를 옮겨야 할 정도로 불안정한 생활을 지속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1918년 6월 제2회 특별 전로한족대표회의에서 [[이동휘]]와 함께 명예회장으로 선출된다. 여기서 조직된 전로한족중앙총회가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최재형은 여기서 외교부장으로 선출된다. 또한 4월 상하이에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그를 재무총장으로 추대하기도 한다. 이렇게 그는 3.1운동을 계기로 활발해지는 독립운동사에서 중심 인물로 자리잡는가 했다. 하지만 결국 그의 활약은 여기까지였다. 연해주 일대에서 적극적으로 [[적백내전]]에 참가중이던 [[일본군]]은 1920년 [[우수리스크]]를 급습, [[연해주 4월 참변]]을 일으키면서 최재형을 제일 먼저 즉결 처형했다. 최재형은 충분히 피신이 가능했으나 피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사라지면 가족이 고통당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최재형은 왕바실재 산기슭에서 동지 [[김이직]]과 [[엄주필]]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최재형은 이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그의 옛 집이 독립운동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10720894|#]] 가족은 두번째 아내 옐레나 외에도 자녀로 4남(표트르[* 1883년생. 한국 이름은 최운학. 1919년에 서시베리아 전투에서 사망.], 파벨(1900년생), 발렌틴(1908년생), 비켄티(1914년생)) 7녀(베라[* 1885년생. 중국으로 이주했다고 알려져있다.], 나데즈다(1888년생), 류보피(1898년생), 소피야(1902년생), 올가(1905년생), 류드밀라(1910년생), 옐리자베타(1912년생))가 있었다. 가족들은 다른 한인들과 함께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뿔뿔이 흩어졌으며 그 중 최초의 한인 출신 러시아 해군 장교였던 둘째 아들 파벨(또 다른 이름은 [[최성학(1900)|최성학]]), 딸 류보피는 1930년대의 스탈린의 대숙청에 휘말려 총살당하고 자식들 중 일부는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기도 한다. 사위들 중 4명(기록이나 증언에 따라 5명)도 총살당하는 등 크게 고생했다. 그의 자식 중 살아남은 건 발렌틴, 올가, 옐리자베타, 류드밀라, 소피야 뿐이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