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은희(언론인) (문단 편집) === 최초의 여기자 === [[파일:997448335A2BBFA71D.jpg]] 기자 시절 최은희. 1924년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이던 최은희는 여름 방학을 맞아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의 집을 방문한다. 그녀와 친분이 있었던 부인 허영숙은 산부인과를 운영했는데, 한 손님이 진료비를 떼어먹고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한 일이 있었다. 최은희는 다음 날 바로 그 손님의 집으로 달려가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마루에서 [[냉면]]을 시켜먹고 [[낮잠]]까지 자는 등 대담함을 보였다. 이윽고 손님이 돌아오자 최은희는 돈을 요구했고, 손님은 처음엔 '말도 안되는 돈이다'라며 거부하다 나중에는 금액을 슬슬 올리더니 결국 85원 10전이라는 총액을 다 내놓고 말았다. 이 에피소드로 인해 최은희는 이광수의 눈에 들었고, 이광수는 당시 '부인기자'를 구하는 중이던 [[조선일보]]에 최은희를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결국 대학을 중퇴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최초의 여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신출귀몰한 변장 능력으로 스타 기자의 반열에 오른다. 취재를 위해서라면 땟국물이 묻은 행랑어멈의 옷을 입고, 아이를 업고, 무청까지 든 채로 완벽한 변장을 선보였다. 또한 조선일보가 무선전화 시험방송을 할 때 아나운서로 나서기도 했고, 조선 여성 최초로 시구도 했으며, 조선일보 비행사인 신용인의 비행기에 탑승한 뒤 탑승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1925년 7월 한강 유역에서 대홍수가 발생하자 최은희는 조선여자청년회·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조선여성동우회 등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구호반을 조직하고 기생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이재민들에게 밥을 차려주는 등 구호 활동에도 발벗고 나섰다. [[6.10 만세 운동]] 당시에는 당시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이었던 '''[[미와 와사부로|미와 경부]](!)'''를 미행하여 경찰서 내로 진입, 일경의 대대적인 검거에 대한 보도를 쓰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