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용술 (문단 편집) == 팩트 논란 == 최용술이 1986년 사망한 후, 지금까지도 그의 행적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요는 양자든 수제자든 뭐든 [[다케다 소가쿠]]랑 특별한 관계였느냐, [[대동류 합기유술]]을 제대로 배운게 맞느냐 2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인데, 이에 대해선 후술되어있듯 상당히 방대하고 때때론 엇갈리는 진술과 자료들이 상존한다. 일단 최용술 본인 말을 들어보면 매체마다 본인의 이력에 대해 좀 오락가락했다. [[https://m.blog.naver.com/aikidokr/221563306938|관련 블로그 칼럼]]. 최용술 도주의 딸 최복선 여사가 [[다케다 소가쿠]]에 관해 언급한 적도 있다. 1998년 한 [[http://m.cafe.daum.net/dojunim/tSa/28?q=D_ohkQUOSAyUE0&|인터뷰]]에 의하면, 본인도 일본 홋카이도에 살던 당시 실제 최용술 집에 주기적으로 머물다 가는 다케다 선생을 보았으며, 오히려 이땐 다케다만 오면 좌불안석인 부모가 어린 마음에 잘 이해가 안되 다케다 선생을 미워했다고 한다. 사망 2달 전에도 홋카이도에 있던 아버지 집에 머무르다 갔는데, 그로부터 2달 후 소가쿠가 객사했다는 부고장이 집에 도착해서 최 여사가 [[문맹]]인 아버지 최용술에게 직접 알렸다고 한다. 최용술과 장인목[* 최용술 외에 한국에서 대동류를 가르친 또다른 인물로, 마츠다 토시미에게 홋카이도에서 대동류를 배운 뒤, 해방 후 [[대구]]에 국무관을 설립하여 대동류를 가르쳤다. 둘이 만난 적도 있다고. 다만 대동류의 적극적인 전파보다는 접골원을 운영하는게 주 생계 유지였기 때문에 장인목은 지압과 같은 건강유지에 집중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모두에게 배운 바 있는 박병관은 최용술이 자신에겐 대동류를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그렇기에 자신이 보기엔 대동류를 배운 것이 아닌 것 같다며, 스승이 [[까막눈]]이라 역사왜곡을 하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휘둘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오히려 최용술의 스승은 '스님'이었다는 말도 했는데, 이게 다케다한테 소개해줬다는 주지 스님을 말하는건지는 알 수 없다. [[http://m.mooye.net/a.html?uid=14171|2018년 10월 15일 무예신문]]에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수미노 사토시(住野聡) 세계평화무도연합 사무총장이 대동류 합기유술 도쿄본부에서 직접 다케다 소가쿠가 작성한 영명록에서[* 생전에 [[다케다 소가쿠]]는 모든 수업생의 이름을 영명록에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다만 스탠리 프래닌이 소가쿠의 장남 무네미츠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 영명록의 일부가 화재로 소실됐다고 한다.] 최용술이 수련한 기록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는데, 20일 수련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고 한다. 아래는 관련 사진이다. [[파일:1539694005315.jpg]] [[파일:20181016_225946.jpg|width=58%]] [[파일:external/www.martialartstoronto.ca/SenseiKimImage3-219x300.jpg]] 왼쪽은 리처드 킴, 오른쪽은 요시다 코타로. 한편, [[미국]]의 저명한 무술가 리처드 킴[* [[하와이]]에서 활동한 무술가로 일본의 일부 사람들은 리처드 킴이 [[오키나와]] 사람이라며, 그의 성을 金武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헌데, 정말로 金武였으면, 자신을 소개한 영문 이름에 '''Kim'''이라는 발음을 사용했겠는가? 참고로 金이 단독으로 발음될 경우, 일본은 こん(kon)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Jin이라고 발음한다. Kim을 사용하는 지역은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리처드 김(1917~2001)은 [[하와이]] 태생의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미합중국 해병대|미해병대]]에서 복무하였다. 이후 일본에서 요시다 코타로 밑에서 대동류를 수련했다. 어릴 때부터 [[유도]]와 [[가라데]]를 수련하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오키나와]] 무기술을 수련했다. 청장년기와 노년기는 주로 북미와 유럽에서 활동하였다.]이 1984년 미국 [[하와이]]의 합기도인 글렌(Glenn)의 최용술이 정말 [[대동류 합기유술]]을 배운 것이 맞는지 묻는 질문이 담겼다고 하는 편지에서, 최용술이 일본의 우익 조직 [[흑룡회]]의 멤버이자, 다케다 소가쿠(武田惣角)로부터 스승을 대신해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인 교수대리(敎授代理)를 받은 요시다 코타로(吉田幸太郞)의 뛰어난 '''조선인 제자'''였으며(=자기 선배), 그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가 자신이 배운 무술에 '''합기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증언한다. 또 최용술 도주의 일본 이름이 요시다 아사오(吉田朝男)였다고 증명한다. 이 때문에 일본을 비롯한 많은 위키백과에서는 최용술을 요시다 코타로 쪽의 제자로 분류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정황상 다케다 소카쿠한테 배사하되 실질적으론 오랜 시간 요시다 코타로한테 배운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주장한 인물은 [[중국무술]] 권사로, 실제로 중국 무술계에서는 스승의 집에서 잡일을 하고 대신 사형에게 무술을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렇게 배운 사람들도 스승에게서 배웠다 하지, 사형에게 배웠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무술 수련자들은 이와 같은 설이 마냥 당혹스럽진 않다고 한다. 한편 최용술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이미 어린 시절 다케다에 의해 거두어져 아버지로 여기며 자랐으므로, 굳이 형식적으로 스승-제자 관계로 입적할 사항은 아니었다고도 보여지는데, 한편으론 상기되어있듯 영명록에 수련 기록이 적혀는 있다. 참고로 흑룡회란 일본 제국 시대 국가주의 우익조직으로, 일제가 헤이롱장(흑룡강黑龙江) 일대를 차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흑룡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들은 대한제국의 식민지화에 적극 앞장섰고, [[일진회]]를 배후에서 조종하였으며, 이후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조선인 학살을 주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연유로 일본 무술계는 최용술 도주가 반일감정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해방된 고국에서 누구에게 배웠는지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것 아니냐고 추정하기도 한다. 다음은 리처드 킴의 답신 전문. || dated November 26, 1984: The founder of Hapkido, Mr. Choi -- Japanese name Yoshida, is not related to Yoshida Kotaro, Samurai extraordinary. Mr. Choi was a student of Yoshida Kotaro. In fact he was an excellent student. You must realise that before Japan surrendered in August 15, 1945, all Koreans had Japanese citizenship and names. Mr. Choi returned to Korea and taught Daito Ryu Aiki Jujutsu. He named it Hapkido which in Japanese is Aikido. Since his time Hapkido has become modified with a distinct Korean flavour. It is an excellent art. I would that the thrust and direction of Hapkido where it is different from what originally Mr. Choi had taught is in a number of sophisticated kicks which is unique to the Korean style of fighting. Probably, according to some, it may have improved the art for modern day consumption. That would be a matter of debate. You are learning a good art. Stay with it and practice until perfection. Sincerely, Richard Kim, Hanshi [* Hanshi (範士)는 무술에서 8단 이상의 유단자의 호칭을 뜻한다.] [[합기도]]의 창시자, 최용술 -- 일본명 요시다, 은 비범한 사무라이인 요시다 코타로의 혈연은 아닙니다.[* [[http://endic.naver.com/enkrEntry.nhn?sLn=kr&entryId=d430d7d7637a41c3bb1a3164dc4edeba&query=related|related]]는 혈연, 관련되었다는 수동태인데, 이를 빌미로 일본에서 최용술이 요시다 아사오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한다. 당연하지만, 후술할 '해방 전까지 한국인들은 일본의 [[창씨개명|이름]]이 있었다.'는 문장 때문에라도, 최 옹의 일본 이름인 요시다 아사오 (吉田朝男)와 요시다 코타로 (吉田幸太郎)는 ''''혈연(친족)관계가 아니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애초에 바로 뒤에 제자라는 표현을 썼으니 관계가 없다는 해석은 불가능하다.] 최용술은 그의 제자였습니다. 실제 그는 우수한 학생이였지요. 일본이 1945년 8월 15일에 항복하기 전에, 모든 한국인들은 일본의 시민권과 일본식 이름이 있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최용술은 귀국 후 [[대동류 합기유술]]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일본어로는 아이키도라 불리는 합기도란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 합기도는 한국인 입맛에 맞게 독특하게 수정됩니다. 합기도는 우수한 무술입니다. 첨언하자면, 합기도에 한국의 무술 스타일인 수준 높은 [[발차기]]가 도입되면서 원래 최용술이 가르치고 추구하던 것과 달라진 듯합니다. 아마, 일부의 주장대로 합기도는 현대인의 기호(선호)에 따른 무술로서 개량된 듯합니다.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요. 당신은 좋은 무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완벽해질 때까지 수련에 매진하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리처드 킴 범사 || 한편, 최용술 측은 [[아이키도]]의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 관련해서도 아이키도 측과 상반되는 진술을 한 적이 있는데, 자세한건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ty395&logNo=140056378303&widgetTypeCall=true|해당 문서]]로. 여담으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혼자가 아니라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선생 및 요시다(吉田)가의 부자(父子) 등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수련했고 관련 증언들도 존재한다. 아이키도 측에서 최용술과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친분이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는데, 1988년 Aikido journal 77호의 우에시바 기쇼마루(植芝吉祥丸) 아이키도 2대 도주 인터뷰를 보면, 자신의 아버지이자 아이키도의 1대 도주인 [[우에시바 모리헤이]] 개조가 [[https://web.archive.org/web/20060704102544/http://www.aikidojournal.com/article.php?articleID=445|최용술 도주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1997년 10월, [[한풀]]의 신상득 기자 또한 인터뷰를 통해 같은 내용의 답변을 들었다. 신상득 기자에게 기쇼마루는 "최씨 성을 가진 조선인이 '''[[다케다 소가쿠|다케다]]의 제자'''로서 열심히 수련하는 것을 보았다고 들었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고 추정된다는 내용도 덧붙인다. || Q: On another subject, it is true that '''a Korean named "Choi"''' who founded "Hapkido" studied Aikido or Daito-ryu? A: I don't know what art it was but I understand that there was a young Korean of about 17 or 18 who participated in a seminar of Sokaku Takeda Sensei held in Asahikawa City in Hokkaido. It seems that he studied the art together with my father and would refer to him as his "senior". Q: If that's the case the art must have been Daito-ryu. A: I've heard that this man who studied Daito-ryu had some contact with my father after that. Then he returned to Korea and began teaching Daito-ryu on a modest scale. The art gradually became popular and many Koreans trained with him. Since Aikido became popular in Japan he called his art '''Hapkido'''[written in Korean with the same characters as Aikido], Then the art split into many schools before anyone realized it. This is what my father told me. I once received a letter from this teacher after my father's death. 질: 다른 질문입니다만, 합기도를 창시한 '''한국의 '최'라는 인물'''이 아이키도 혹은 대동류를 배웠다는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답: 어떤 무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홋카이도의 아사히카와에서 다케다 소가쿠 선생의 강습회에 17,8세의 한국인 청년이 있었다고 합니다.[* 최용술 도주와 아이키도 창시자인 모리헤이가 처음 조우한 것은 1915년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에서였고, 최용술이 1913~1917년에 스승 다케다와 함께 일본 전역을 순회하던 중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 사람은 [[우에시바 모리헤이|아버지]]를 "선배"라 부르며, 같이 운동했다고 들었습니다. 질: 사실이라면, 그것은 분명 대동류겠군요. 답: 그 후에도 그 [[대동류 합기유술|대동류]] 수련생과 아버지와 약간의 교류가 있었다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가서도 작은 규모로나마 대동류를 계속 지도하였으며, 인기몰이를 하며 다수의 한국인들이 그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아이키도]]가 일본에서 유명세를 타자, 그는 이름을 [ [[아이키도]]를 한글로 쓴] '''[[합기도|합기도(合氣道)]]'''라고 지었는데, 이 후 많은 유파로 분열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그 사람에게서 편지가 온 적도 있습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