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용술 (문단 편집) == 상세 == 본인 주장에 의하면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일본인 부부랑 일본으로 건너갔다. 양친과 알던 사이로 최용술을 이뻐해 데려갔다는 말도 있고 그냥 유괴되었다는 말도 있다. 본인 경력을 소개하는 매체마다 말들이 좀 다르게 나왔다. 건너온 후 적응을 잘 못하자 결국 주지스님[* [[https://ja.m.wikipedia.org/wiki/山本秀雄|야마모토 히데오(山本英雄)]]의 아버지인 주지스님으로 추정된다.]에게 맡겼다. 나중엔 주지스님의 친구였던 [[다케다 소가쿠]]가 데리고 갔다. 그 뒤 다케다 소가쿠 양자가 되었다는 소리도 있고 그냥 제자가 되었다는 소리도 있고 글마다 좀 다르다. 이후 다케다 선생의 집안에서 최용술은 자랐고, 다케다 선생이 제자들과 입산 할때 같이 [[대동류 합기유술]]을 수련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는데, 자세한 건 후술.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최근엔 대동류를 배운건 맞다까진 인정하는 분위기. 오늘날까지도 최용술의 행적은 여러 시각에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발굴되는 중이다. 일본의 패전 후에 한국으로 귀국했는데 도중에 짐을 도난당했고[* 돈, 목록과 오의 등의 두루마리, [[우치가타나|검]] 두 자루 등 병장기가 있었다 한다. 딸인 최복선 여사 말에 의하면 22개 박스가 있었는데 이 중 1박스를 나르겠다고 도와주던 청년이 있었는데 가고 보니 1박스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전재산이 다 털린 수준은 아닌지,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도 황간에도 가고 어머니 외가에도 갔다가 여차저차해 [[대구]]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후 [[대구]]에 정착했다고 한다. [[풀빵]]을 만들어 팔며, 남자 아이들에게 '자신의 딸을 제압하면 풀빵을 공짜로 주겠다.'며 호객했다고도 한다. 진짜로 덤벼드는 남자 아이도 있었지만 역으로 그의 딸에게 혼쭐 났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길거리에서 힘 꽤나 쓰는 양조장에 쌀포대를 들고 나르던 장정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키도 작은 최용술이 그들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광경을 그의 첫번째 제자이자 당시 양조장 집 사장 아들이던 서복섭이 목격했다. 회고에선 한눈에 저것이 [[유술]]인 것은 알았는데, 형(型)이 특이해서 놀랐다고 한다. [[유도]] 유단자였던 서복섭은 최용술의 진가를 바로 알아보고,[* 이 당시 일화로 서복섭은 그의 유도기술을 이용하여 최 도주를 제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제압당했다고 한다. 30대 초반의 자신이 한참 나이가 많던 최용술에게 꼼짝도 못하자 제대로 배움을 청했다고 한다. 후일 그는 [[용술관]]의 유래를 듣고, "최옹의 기술이 아직도 전수되느냐?"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는 후문도 있다.] 최용술 도주는 서복섭의 제안으로 양조장의 2층에서 무술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합기도]]의 시초가 되었다. 최용술은 자신의 무술을 [[야와라]](柔) 혹은 주지스라고 했다는데 가르칠 때는 야와라, 혹은 합기유권술이라 칭했다. 가끔 대동류라고도 했다고 한다. 야와라(柔)는 [[유술]]이라는 뜻이고, 유권술은 서복섭이 제안한 것으로 '유술기에 권술까지 아우르는 무술임을 천명하자'는 의미였다고 한다. [[합기]] [[유술]]의 실력만큼은 확실한 사람이었던 모양. 심지어 본토인 일본 대동류 쪽에서도 인정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돈을 좀 심하게 밝혔던 것으로 보인다. 최용술의 성격에 대해선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았다는둥 깐깐했다는둥 글마다 좀 다른 부분이 있지만, 확실한건 최용술은 초기 제자들에게도 수련비에 따라 기술을 철저히 차별하며 가르쳤는데, 쉽게 말해 무술로 돈벌이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예 이해 못할건 아닌게, 당시엔 최용술도 돈이 별로 없는 처지긴 했다. 1948년에 양조장 사건이 있은 후 8년이 지난 1956년 들어서야 겨우 자기 집과 도장을 마련했다고 한다. 물론 이후에도 그랬다면.. 그는 제자에 따라 그냥 [[유술]]과 [[합기]]가 들어간 유술의 차이를 두었는데, 유술만 가르칠 제자에게는 합기 올리기를 위한 단전호흡을 왜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을 정도였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얼마나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고 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이 술기는 쌀 몇 가마짜리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라고 늘 강조하여, 제자들이 [[수전노]]라고 비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도장 안에 기다란 [[커튼]]을 설치하고 큰 돈을 지불한 '''특별 제자'''에게만 특별한 술기를 가르쳤음은 초기 제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덕분에 당시 돈이 궁했던 한국 [[합기도]]의 원로 중 한 명인 [[지한재]]는 훗날 최용술한테 맺힌 것이 많은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이런 최용술의 방식 덕분에, 오늘날 한국 [[합기도]]는 지한재처럼 돈을 많이 내지 못한 제자들이 최용술에게 배운 것을 대충 더듬어서 실전된 무술을 새로 복원하는 수준으로 해체시키고 붙이고 재창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의 대동류와는 완전히 다른 짬뽕 무술이 되어버렸다. 다만 이렇게 되어가는 과정에서 [[대동류 합기유술|대동류]] 특유의 [[유사과학]]스러운 특징은 어느 정도 희석되고 좀 더 합리적인 [[호신술]]로 바뀌면서 의도치 않게 한국 무술로 정착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1960년 들어선 3월 정식으로 '대한합기술무도회(협회)'를 설립했고, 1963년 9월 '대한기도회'를 창립하고 제1대 총재로 취임, 1968년에는 '대한무도회 전국합기도통합 제1회 전국시범대회'에 나가 시범을 보이는 한편, 추대로 "대한합기도"라는 명칭의 도주로 취임하게 된다. 이때부터 한국에서 '합기도'라는 명칭을 공식 사용하게 되었다.[* 전후 맥락을 보면 당시 일본에서 인기를 끌던 [[아이키도]](합기도)를 그대로 따왔을 가능성도 있지만(일본에서 재단법인 아이키카이(합기회)는 1948년 설립된다), 합기라는 단어 자체는 최용술이 자주 사용하였고, 합기도란 말 자체를 일본 아이키도(합기도)보다 먼저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합기]]라는 말 자체는 [[다케다 소가쿠]] 생전부터 쓰던거니(다만 우에시바 쪽에서 다케다에게 이 개념을 합기란 단어로 하자고 건의했다고 알려져있긴 하다) 이전부터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어찌됐든 공식적으론 아이키카이가 먼저 설립된건 맞다. 그래서인지 일본 아이키도(合氣道) 협회에선 한국에 합기도 명칭을 쓰지 말라고 은근히 요구하기도 하는 모양인데(이는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아이키도를 창시하면서 기존의 기술적 '합기'라는 용어를 아이키도에선 [[철학]]적인 개념으로 치환하고, [[기술]]적인 부분은 '호흡력'이란 용어로 대체하려 한 맥락 때문도 있어보인다.), 최용술 제자인 김윤상은 2010년대 인터뷰에서 덕암류 합기유술은 대동류 합기유술에서 파생된건데 (배다른 형제격인) 아이키도랑 상관없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