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염 (문단 편집) === 죽음 === 조조가 위왕에 오르니, 전에 최염이 추천했던 [[양훈(삼국지)|양훈]](楊訓)이라는 사람이 비록 재기는 부족하지만 청렴하고 성실하여 도의를 지켰으므로 조조는 예의로써 그를 초빙했다. 조조가 위왕이 되자 그는 조조의 공적과 정벌의 노고를 칭송하고, 성덕(盛德)을 찬양하였다, 당시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양훈을 조소하면서 최염에게 사람을 추천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최염은 양훈에게서 표의 초고를 받아 보고, 양훈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의 상주문을 살펴보았소. 위왕의 사적이 우수할 뿐이오. 시대여! 시대여! 응당 변혁해야만 되는 시대요. 최염의 본의는 의론하는 자들이 견책하기만을 좋아할 뿐 객관적으로 정리(情理)를 살피지 않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조조에게 최염의 편지가 그 시대를 무시하고 조조를 원망하고 비방한 것이라고 말하였으므로, 조조는 화가 나서 말했다. >속담에 ‘여자를 낳을 뿐(生女耳)’이라는 말이 있는데, ‘뿐(耳)’이라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니오. ‘응당 변혁해야만 되는 시대요(會當有變時)’라는 것이 가리키는 의미도 겸손하지 못하다. 그래서 최염을 처벌하여 역소에서 잡일 하는 노예로 만들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보도록 했는데, 그의 말과 얼굴에는 굴복의 기색이 없었다. 태조가 명령을 내렸다. >최염은 비록 형벌을 받았는데도, 집에 빈객들을 통하게 하여 문 앞은 장사하는 사람의 집과 같다. 그는 빈객들을 규룡과 같은 수염을 기르고 얼굴을 직시하니, 마치 노여워하는 것 같다. 그래서 최염에게 죽음을 명했다. 《위략》에는 최염의 죽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최염의 글을 얻었다. 그는 그것을 상자에 넣어 두건으로 싸고 행차를 할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 당시에 최염과 오랫동안 불편하게 지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길을 가다가 최염의 이름이 적힌 궤짝을 가지고 가는 사람을 보고 뒤를 따라가 자세히 살핀 다음 그 사실을 고발했다. 조조는 최염이 속으로 자신을 비방하고 있다고 하여 그를 잡아서 곤형(髡刑)에 처한 다음 유배시켰다. 전에 최염을 고발했던 사람이 다시 이렇게 고발했다. >최염이 유배된 후에 다시 수염을 기른 것은 마음속에 불평을 품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조공은 그의 말이 옳다고 하여 곧 죽이려고 했다. 청공대리(淸公大吏)를 시켜서 최염에 대한 것을 조사하게 하고 이렇게 지시했다. >3일 이내에 자세히 보고하도록 하라. 그러나 최염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며칠 후에 관리가 최염은 평안하다고 보고했다. 조공은 화를 내며 최염이 분명히 홀로 칼을 갈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리가 그 사실을 최염에게 알리자 그는 관리에게 감사하며 이렇게 말하고 자살했다. >내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공의 뜻이 그렇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진수(역사가)|진수]]는 그를 평하여 조조는 기피하는 감정이 강한 성격으로 [[공융]], [[허유]], [[누규]]는 모두 옛날의 관계에 의지하여 불손한 태도로 대했다가 처형되었지만 최염은 조조가 지시하여 처형되도록 한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억울하게 죽었으며, "사관입장에서 보아 그는 어떠한 죄도 없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적었다. 위진정통론 입장에서 쓰여진 정사의 저자조차 이렇게 말할 정도면 최염을 죽인 조조가 얼마나 많은 비판을 받았는지 짐작 가능하다.[* 진수가 정사에서 조조에 대해 비판적인 표현을 한 사례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다. 하나는 최염 숙청, 다른 하나는 [[서주 대학살]]이다. 위진정통론자 입장일 수밖에 없는 진수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비(非)조조 세력 및 후대에서 이 두 가지 병크를 저지른 조조에 대해 어떻게 봤을지 뻔한 노릇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