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양업 (문단 편집) == 생애 == 1821년 [[충청도]] 홍주 다락골 새터[* 현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839년 [[기해박해]]에서 [[순교]]해 [[한국 103위 순교성인]]에 오른 인물이고,[* [[경기도]] [[안양시]] 수리산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묘가 조성되어 있고, [[천주교 수원교구]] 수리산성지로 조성되어 있다.]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도 남편과 함께 순교했다. 다만 어머니는 순교 전에 아이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보고 잠시 배교했던 전력 때문에 103위 성인 시성에는 들지 못했다가, 2014년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가 시복되면서 복자품에 올랐다. 여하튼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본시 한양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1836년 [[김대건 안드레아]],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두 동기들보다 1살 위. [[유학]] 도중 위열병으로 [[요절]]하여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임시로 만든 신학교에 입학했다. 1839년 아편문제로 민란이 일어나자 [[필리핀]] 롤롬보이 [[도미니코 수도회]] 농장으로 피난갔다 오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신학]] 공부를 꾸준히 했다. 다만, [[중국]]의 정치적인 사정과 겹치면서 신학 공부는 했다가 중단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1844년 [[부제(성직자)|부제]]서품을 받았다. 먼저 사제서품을 받은 동기 김대건 신부는 조선에서 사목을 하다가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 그도 귀국하려다가 실패한다. 1847년 [[홍콩]]으로 이주한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에서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의 행적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으며, 결국 1849년 [[상하이]]에서 [[성품성사|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요동]]에서 사목하면서 지내다가 극적으로 귀국에 성공하여 1850년부터 사목을 시작하는데, 그 여정이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충청북도]] [[진천군]] [[배티성지]]를 기반으로 [[천안시|천안]] 이남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남지방의 127곳에 달하는 [[공소(가톨릭)|공소]]를 모두를 도보로 걸어 다녔는데, '''한 해 동안 7,000리(약 2,800km)'''를 걷는[* 하루 평균 약 7.7km] 이 생활을 '''11년 6개월'''이나 계속했다. 1,000리가 대충 392.7km고,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부산 터미널까지 거리가 약 380.4km다. 즉 1년에 서울-부산을 3번 반 '''걸어서''' 왕복한 셈이다. 바쁠 때에는 하루에 80~100리(약 32~40km)를 걸으며[* 군대에서 행군을 해 봤으면 알겠지만, 평균적으로 8-10시간을 걸어야 하는 거리다.]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나며 한달 동안 잠을 잔 날이 나흘밖에 안 됐다고 한다. 각지에 흩어진 공소 127군데를 모두 돌아다니면서 고해성사와 미사를 집전했으며, 이 와중에 기해박해 이후 조선에 못 들어오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주교]]와 신부들을 다시 초청해 조선 천주교회를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이전 시대의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도 수집했는데, 이 기록이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를 통해 [[교황청]]에 전해지면서 조선 시대의 최초 103위 성인을 선정할 때 중요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이런 왕성한 활동은 필연으로 [[과로]]로 이어졌고, 결국 1861년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치면서 [[경상북도]] [[문경시|문경]]에서 사망하였다.[* 최양업 신부 집안의 구전에 의하면, 과로에 변질된 [[소고기]]를 먹고 걸린 [[식중독]]까지 겹친 합병증으로 인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35년이나 지난 [[1896년]]이 되어서야 3번째 한국인 사제가 서품받는데, 바로 '''강도영 마르코'''이다.([[http://m.cpbc.co.kr/paper/view.php?cid=304822&path=200908|#]]) 그리고 최양업 신부가 선종하고 5년 뒤인 1866년 조선 최대이자 최후의 박해였던 [[병인박해]]가 발생한다. 만약 최양업 신부가 이때까지 살아있었더라면 박해를 받아 순교했을 확률이 높다.[* 최양업 신부 선종 전후로 조선은 어느 정도 박해의 수위를 줄이기도 했고 대원군은 집정하면서 천주교, 정확하게는 천주교의 뒤에 있는 서양 열강에 관심이 있었기에 생전 최양업 신부와 친분이 있었고 이미 조정에 출사해 있던 남종삼 요한을 만나 이미 잠입해 있던 프랑스 선교사와 접촉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그사이에 국제 정세가 악화되고 천주교에 대한 여론도 다시 나빠지면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된다.] 최양업 신부의 묘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있는데, 이곳은 박해가 한창일 때 많은 가톨릭 신자가 숨어있던 신앙촌이었고, 최양업 신부는 살아 있을 때 이곳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했다. [[황사영]]이 백서를 썼던 토굴도 여기 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지로 조성하였는데, [[천주교 원주교구]] [[배론성지]]가 바로 여기다. 유명한 성지이기 때문에 순례하러 오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