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병식 (문단 편집) === 실업 및 프로 시절 === 1988-89 농구대잔치 결승에서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기아산업]]의 쌍돛대가 된 [[김유택]]-[[한기범]]에 골밑을 속절없이 털리며 패했던 [[전주 KCC 이지스|현대전자]]로선 대학 No.1 센터 최병식을 스카웃하며 1989 시즌 권토중래를 노렸고, 실제로 최병식은 현대전자 입단첫해부터 주전으로 뛰며 '''1989-90 농구대잔치 신인상'''을 차지하는 등 맹활약했지만 현대는 1989-90 농구대잔치 결승에서 또한번 기아에 패하며 2년 연속 준우승에 그친다.[* 사실 애초부터 김유택(197cm)-한기범(207cm) 콤비와 최병식(193cm)-김성욱(195cm)-이호근(193cm)의 골밑대결은 높이에서나 기량에서나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기아에서나 대표팀에서의 김유택-한기범은 전방위 공격옵션이자 최고의 수비수들이었지만, 최병식과 [[김성욱(농구)|김성욱]] 등은 그저 팀의 에이스 [[이충희]], 이원우가 편하게 슛을 던질수 있게 스크린하고 리바운드하던 블루워커 역할을 위주로 하던 선수들이었다. 더구나 기아에는 무려 [[허재]]가 있었으니.. 85-86 시즌 NBA [[휴스턴 로켓츠]]의 원조 트윈타워 [[하킴 올라주원]]-랄프 샘슨에 [[마이클 조던]]이 같이 뛰었다고 보면 된다.] 실업 2년차때 [[국군체육부대|상무]]로 입대한 최병식은 [[1990-91 농구대잔치]]에서 ~~[[강동희]]~~, [[이영주(농구)|이영주]], [[이훈재]] 등과 함께 상무의 돌풍을 이끌며 상무를 1차대회 준우승 및 최종성적 4위까지 올려놓았고, 본인은 '''농구대잔치 베스트 5'''에 이름을 올리며 커리어 최전성기를 달린다. 이후 최병식은 [[1991-92 농구대잔치]] 1차대회까지 마치고 제대하여 이영주(G, 180cm)와 함께 2차대회부터 현대전자에 합류하지만, [[이충희]], 이원우의 노쇠로 인해 4년 연속 결승진출에 실패하고 3위에 그치고 만다. [[이충희]]가 은퇴한 뒤 [[유도훈]], [[김지홍]], [[임근배]] 등과 함께 팀을 꿋꿋히 이끌어갔으나, 세대교체에 실패한 현대전자는 [[1993-94 농구대잔치]] 이후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대학돌풍세의 주요 희생양이 되어버렸고 연세대, 고려대 오빠들이 가볍게 격파할 수 있는 1, 2단계 적(;;) 수준일 뿐이었다. 빅맨치고 단신(193cm)이었으나 힘과 탄력을 무기로 버텨왔던 최병식은 더 힘세고([[현주엽]]) 더 높이 뛰고([[전희철]]) 더 잘하는([[서장훈]]) 대학센터들과의 맞대결에서 경쟁력이 전혀 없었고, 어느새 "파워-탄력을 겸비한 빅맨"에서 "노마크 중거리슛도 못넣는 나이든[* 아직 서른도 안되었지만, 애초부터 워낙 노안이었다.] 꼬마빅맨"이 되고 말았다. 이후 최병식은 [[1994-95 농구대잔치]](현대전자 5위)를 마지막으로 29세의 젊은 나이에 현역에서 조용히 은퇴하는데, 최병식이 은퇴한 후 현대전자는 제대로 몰락하여 [[1995-96 농구대잔치]]에서는 8강 플레이오프에도 오르지 못했다. 당시 선수들 중 특이하게 자유투를 뱅크슛으로 쏘던 선수[* 뱅크슛 자유투를 구사했던 또 다른 선수로는 [[문경은]]이 있다.]였는데, 어깨가 워낙 넓다보니 슛폼이 다소 특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