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민식(사진가) (문단 편집) === 사진작가로써 민주화 이전의 삶 === ||[[파일:external/s11.postimg.org/d104m_1957.jpg]]|| ||[[파일:external/s17.postimg.org/4751044d29821.jpg]]|| ||1957년 부산, 최민식|| ||1965년 경남 언양장터, 최민식|| 인간가족을 보고 사진에 푹 빠지게 된 그는 헌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다가, [[1957년]]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후 [[미국인]] [[신부(종교)|신부]]가 운영하는 고아원 '소년의 집'에서 전속 사진사로 고용되면서 본격적인 사진가로써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사진작가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인생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내며 부산 서민의 모습, 특히 자갈치 시장의 서민들의 모습을 사진 속에 많이 담아냈는데, 이 때문에 자갈치시장 사람들이 그에게 '''자갈치 아저씨'''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사진작가로써의 평가가 어땠는 지는 몰라도, 그는 사진작가로 살면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야만 했다. 팔리지 않는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최민식 작가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장성한 그의 아들이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으러 다녔을 때 최민식 작가의 부인이 아들 카메라를 뺏으며 "너도 네 애비처럼 되려고 그러냐!" 라며 아들을 혼냈다고 한다.] 당장 [[필름]]과 인화지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지금에서야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지만 그 당시엔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필름은 [[주한미군]]부대의 지인을 통해서 구해야만 했고 인화지는 일본에서 밀수한 것을 사서 써야만 했다. 또 사진 실력을 키우려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며 사진기법을 공부해야만 하는데 [[10월 유신|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해외 사진집을 구하기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국 작가들의 사진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는 제지공장 사장에게 부탁해 미국에서 수입해온 폐지를 뒤져야만 했다. 폐지를 뒤지면 제일 많이 나오는 잡지가 [[라이프]]였다고. 하지만 한 주제만을 고집해온 그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어서 1962년 대만 국제사진전을 시작으로 수많은 국제 사진전에서 그의 작품이 입상하게 된다. 특히 1967년 영국 사진연감에서 그에게 '''카메라계의 렘브란트'''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으로 시작해서 '''빛의 사진작가''', '''가장 한국적인 사진작가''' 등의 호평이 쏟아지게 된다. 국내에서도 1963년 제1회 동아 사진콘테스트 입상을 시작으로 다음 해 한국 국전에 입상하게 되고, 1969년 국내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1968년 [[동아일보]]를 통해 그의 첫 사진집 '''인간'''' 1집이 나오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