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민식(사진가) (문단 편집) === 사진가가 되기 까지 === ||[[파일:external/s16.postimg.org/htm_2006091820280530003010_001.jpg]]|| ||사진집 인간가족 中[*작품명 유진 스미스의 'Walk to Paradise Garden']|| 1928년 [[황해도]] [[연백군]]의 가난한 [[소작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작가의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 집에서 [[도장(도구)|도장]]을 파며 돈을 벌었고, 나머지 일곱 식구는 [[소작]]을 하거나 나무를 하면서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최민식 작가의 아버지는 최민식 작가에게 성 빈첸시오[*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 de Paul) 1581년~1660년, '빈첸시오회와 라자로회' 선교회를 설립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병원과 고아원을 설립한 프랑스 신부,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주었고, 그림을 잘 그렸던 작가에게 [[장 프랑수아 밀레]]처럼 가난한 서민의 모습을 그리라는 조언도 해 주며 최민식 작가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최민식 작가가 15살이 되던 [[1943년]], 작가의 아버지는 작가에게 손재주가 좋으니 도회지로 나가서 돈을 벌어보라고 권유했고 최민식 작가는 [[평안남도]] [[진남포]][* 지금의 남포시.]에 있는 [[미쓰비시 그룹|미츠비시]] 기능자 양성소에서 2년 동안 기술을 배운 후 [[비행기]] 날개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노동자들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염소가스'''[* [[염소(원소)|염소]]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염소가스는 몸 안의 물과 결합하여 염산이 되고, 폐를 녹여 끔찍한 고통과 호흡곤란을 유발하는 사람에게 매우 치명적인 독가스이다.]를 들이마시며 일을 해야 했다. 그 때 공장의 염소가스가 어찌나 독했던지 면 작업복이 하루만에 삭아서 닳아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목숨 걸고 일해 받은 봉급이 겨우 쌀 1가마였다고.] 만약 오랫동안 일했더라면 목숨이 위험했을 지도 모르지만 하늘이 도와서인지 2년만에 [[8.15 광복|해방]]이 찾아와 최민식 작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그림 공부를 위해 [[서울특별시|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이후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이산가족이 되고 만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던 작가는 값비싼 학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낮에는 식당에서부터 인쇄소, 제과공장 등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밤에는 미술학원 야간반을 다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3년간 병참부대의 [[철도]]대대에서 부사관으로 군복무를 하게 된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군복무를 마친 작가는 결혼을 하고 나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처남]]과 함께 모직공장에서 일하게 되지만, 미술에 대한 열망을 잠재울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아내와 처남에게 [[일본]] [[유학]]을 떠나겠노라고 선언하게 된다. 다행히 아내와 처남은 작가의 일본 유학을 지지해주었고 특히 처남은 그가 일본으로 떠날 수 있도록 작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던 그는 [[1955년]] 일본으로의 밀항길에 오르게 된다. 어두운 새벽 영도에서 16명의 사람과 함께 작은 어선으로 일본 [[규슈]]에 도착한 작가는 규슈에서 [[도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최민식 작가의 일본어는 유창한 편이었지만 [[콩글리시|일본인과 구별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기에]] 검문에 걸릴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으나 다행히 기차 안에서 어느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본인과 함께 도쿄로 갔던 남자 1명을 제외하고 함께 밀항한 나머지 14명의 사람들은 전부 한국으로 강제송환 당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정말 하늘이 도운 게 아닐까 싶다.] 도쿄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학비를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았고, 도쿄의 식당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게도 그 식당 주인의 딸이 도쿄중앙미술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었던 미술학도였고 식당 주인딸의 도움을 얻어 도쿄중앙미술학원 야간부에 입학하게 된다. 아무래도 식당에서 버는 돈만으로는 미술학원 학비를 대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그는 학원 동기들과 손수레로 폐품을 모아 팔면서 돈을 버는 등의 일을 병행하면서 학비를 마련했다. 낮에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자금에 여유가 생겼던 작가는 돈이 생길 때마다 [[헌책방]]에 들러 책을 사기 시작했다. 바로 그곳에서 작가는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작가 曰 반세기 동안 사진에 미쳐 카메라를 둘러메게 만든) 작품인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사진집 '''<인간가족>'''을 만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