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만리 (문단 편집) == 기타 == * 서울의 [[중구(서울)|중구]] 만리동과 [[만리재로]]가 바로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동네다. 최만리가 벼슬 살던 때 기거하던 사택이 있던 곳이라해서 시쳇말로 최만리 고개, 만리재로 불렸고 이후 만리동, 만리재로라는 지명이 파생된 것. * 기생 홍랑과 가슴절절한 러브스토리를 가진 삼당시인 고죽 최경창이 그의 후손이다.[* 최경창 해주 최씨 전한공파로 최만리의 5번째 아들이 파시조로 있는 파이다. 최경창의 현손이 소론의 영수 [[최규서]]이다.][* 후에 최경창도 숙종조에 청백리에 녹훈이 된다.] * 최만리 등의 상소는 '훈민정음을 집현전이 아닌 세종이 직접 비밀리에 창제했다는 설'의 증거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최만리는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이었고 기간도 짧지 않아 집현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아는 인물이었다. 집현전의 실질 수장인 부제학만 6년을 지냈고 집현전 학사 등의 직책으로 집현전에서 일한 기간만 무려 17년이다. [[태종(조선)|태종]] 시절부터 왕의 [[경연]]을 맡는 학사를 했으니 실질적인 기간은 20년이 넘는다. 만약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수행했다면 아무리 비밀리에 작업했다고 해도 최만리가 이러한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는데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상소문은 훈민정음 창제에 세자를 포함한 다른 자식들 역시 관여했단 증거가 되기도 한다. 상술된 상소문을 보면 알겠지만 반대 요지 중 하나가 '''세자가 해야할 일도 많은데 훈민정음 창제에 쓰는 시간이 너무 많다''' 세자가 처음부터 창제에 관여를 한 것인가, 혹은 도중부터 관여한 것인가 그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저 상소문이 올라온 시기엔 이미 세종 이외에 적어도 1명 이상의 자녀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하고 있었단 얘기가 된다. * 유튜브 크리에이터 [[최케빈]]이 최만리의 후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