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만리 (문단 편집) == 평가 == 최만리 사후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에 관한 언급은 딱 두 차례 확인할 수 있다. >初上謂承政院曰: "予在東宮, 朴仲林、崔萬理, 爲侍學。 今依此例, 於書筵官擇可者。" > >처음에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는 박중림(朴仲林)과 최만리(崔萬理)가 시학(侍學)이 되었으니 지금도 이 예(例)에 의하여 서연관(書筵官)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선발하도록 하라." > >----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9월 17일 무오 5번째기사 >世子侍, 上謂弼善鄭孝常曰: "昔在世宗朝, 文宗爲世子, 書筵官崔萬理、朴仲林等輔翼世子, 一有小失, 輒諫不已。 予到今思之, 玆二臣者, 可謂能盡其職, 非偶然人也。" > >임금이 필선(弼善) 정효상(鄭孝常)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세종조(世宗朝)에 있어서 문종(文宗)이 세자(世子)였을 때, 서연관(書筵官) 최만리(崔萬理)·박중림(朴仲林) 등이 세자(世子)를 보익(輔翼)하는 데, 하나라도 조그마한 과실(過失)이 있으면 문득 간(諫)하여 마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도 생각하면, 이 두 신하는 그 직책(職責)을 능히 다하였다고 할 만한데, 우연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 >----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 7월 11일 갑술 1번째기사 그 밖에도 최만리를 언급하는 몇몇 조선시대 문헌이 있으나, 특별히 이렇다할 평가 없이 행적이나 경력 위주의 짧은 소개가 다였다. 그러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에 대한 [[찬양]]이 거듭되고 그 반대 급부로 최만리는 [[사대주의]]자, [[수구꼴통]] 유학자로 까이게 되었다. 이 때부터 유교와 [[양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졌으며 [[민족주의]]가 강조되면서 [[한글]]은 민족 유산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고 조선 시대의 왕들이 전반적으로 폄하되는 가운데도 세종만은 한글 창제라는 업적으로 인하여 높은 평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관]]이 정립되면서 최만리는 '유교적 관념 때문에 새로운 문물과 개화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조선을 퇴보시킨 구시대 양반 세력', '민족 문화를 저버리고 [[외국]] 문화를 추종한 민족 [[반역자]]'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최만리 따위와 같은 고루하고 부패한 저능아도 출연되었던 것입니다. 모화환[* 慕華丸]에 중독된 가짜 명나라인의 추태요, 발광이라고 보아 넘길 밖에 없는 일이지만 역사상에 영구히 씻어 버릴 수 없는 부끄럼의 한 페이지를 끼치어 놓게 됨은 그를 위하여 가엾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 >[[김윤경(1894)|김윤경]], ''조선문자급어학사'',(조선기념도서출판관, 1938)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신복룡 교수는 최만리를 역사의 [[죄인]]으로 본격적으로 단죄한 최초의 학자는 [[일제강점기]]의 한국어학자인 김윤경이라고 보았다. 김윤경은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을 연구하며 최만리를 위와 같이 평한 바 있다. 당시 환경 속에서는 실증적, 종합적 연구보다도 [[일본 제국|일본]]의 식민 지배에 맞서 민족의식을 정립하고 고양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당면 과제였으니 민족의식의 주요 구성요소인 한글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는 반민족행위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윤경의 평은 학자의 논평이라기에는 감정적이다. 특히 최만리를 부패한 [[저능아]]라고 평한 것은 [[인신공격]]에 가깝다.[* 때문에 최만리의 후손인 [[해주 최씨]] 종가에서는 김윤경을 썩 좋게 보지 않는다.] 해방 이후 한국어학계와 한국사학계에서 <훈민정음> 창제 배경에 관해 실증적, 종합주의적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최만리의 상소는 정치, 사회,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함이 지적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최만리의 주장을 재해석해 일부나마 옹호하는 주장들도 있다. 보통은 최만리가 <훈민정음>의 장점을 미처 알지 못하고 새로운 [[문자]]를 사용할 경우 이전까지 [[한문]]을 기반으로 한 정치 및 학문 체계 등에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 우려했다고 주장한다. 최만리의 상소 중 창제 작업의 성급함과 세자의 참여 문제는 <훈민정음>의 중요성을 배제해 보면 충분히 합리적인 지적이다. <훈민정음> 창제 작업은 세종 본인과 세자 [[문종(조선)|문종]], 극소수 최측근 인사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해석에 따라서는 세종 혼자서 작업을 수행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당시 세종은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상당히 나빴고[* [[당뇨]]로 인한 체중 감소 및 실명이 진행 중이었다.] 이 때문에 중요 국정은 문종에게 거의 10여년 간 [[대리청정]]을 맡긴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자 창제 작업에 크게 열중한 것은 최만리에게는 자칫 더 중요한 국정 운영에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만리의 주장을 쉽게 표현하면 "문자 만드느라 [[나라]]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 있고 정작 만들어도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는 [[보수주의]]적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대주의자라는 비난은 부당하다. 세종의 반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종은 2~6항에 대해서는 격하게 반응했지만 사대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았으며 당시에 [[중국]]에 대한 사대는 최만리뿐 아니라 세종까지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당시 문화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 절대적으로 중국이었으며 모든 법제나 기술 등의 중심 역시 중국이었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굴욕]]적인 것이 아니었다.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에서는 [[강대국]]에 대해 이익을 챙기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최만리는 <훈민정음>의 장점을 알지 못했다기보다는 너무 잘 알아서 [[충공깽]]먹고 반대한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조선 [[왕조]]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한자를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현상의 발생과 확대에 대한 최만리의 염려가 현실화된 적이 거의 없다.[* 세종 대에서 약 200년 뒤인 [[숙종(조선)|숙종]] 때 [[남구만]]이 "시골에서는 사람들이 언문만 익히고 한자를 모르는 자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있다"고 말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 오히려 세종 뒷목 잡을 정도로 취급이 박한 편이었다.[* 천시한 것은 아니고 쓰기는 많이 썼다. 대비 같은 경우에는 상당수가 한글로 글을 작성했으며 [[제안대군]]처럼 무식한 [[왕족]]은 한문 대신 한글을 사용하기도 했기에 적어도 조정에서 근무하는 관리라면 모를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 조선조 최고의 [[성군]]인 세종이 창제한 것인 만큼 적어도 왕실에서는 자기 조상님이 만든거니까 평가가 높았다. 다만 위 세종대왕의 발언에서도 그렇고 최만리의 상소문에서도 보듯 한글의 창제 목적 중 하나로 형법 처리에 쓰이는 [[이두]]를 대체하려는 것이 있는데 한글은 그런 공문서로서의 쓰임에는 이르지 못했다.] 최만리의 예상은 조선 왕조 이후인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로 최만리의 시점에서 엄청나게 멀고 먼 미래의 이야기다. 중국의 한자와 방식이 달라서 [[오랑캐]]들이나 하는 일이라서라고 반대하는 부분은 문자가 달라짐으로서 [[문명]]권 사이의 [[문화]]적 공유성이 줄어들고 상호간 이질성이 심해지는 것을 염려한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문자가 달라짐으로서 생기는 문명의 가치 체계의 대변동을 염려했다고도 해석된다.[* 상소 내에서 [[여진 문자]]를 언급하는데 여진 문자는 이 예시에 상당히 부합하는 것으로, [[세종(금)|금나라 세종]]은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한 [[군주]]였는데 그런 군주가 여진 문자 보급에 힘쓴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