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린 (문단 편집) == 생애 == 1878년 [[함경도]] [[함흥부]] 주남면 하서리[* 현 [[함경남도]] [[함흥시]] 통남동.]에서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아버지 최덕언(崔德彦)[* 초명 최숭림(崔崇林).]과 어머니 [[청주 김씨]] 김재항(金在恒)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구한말]] [[대한제국]]의 하급 [[관리]]로 활동했으나 1904년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하게 된다. 이후 [[도쿄시|동경]]제일중학교를 거쳐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다. || [[파일:최린 과거.jpg|width=200]] || || 젊은 시절의 최린. || 귀국 후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고 33세의 나이에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도산 [[안창호]]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도 하였고 3.1 운동의 3원칙을 제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영향도 컸지만 3.1 운동 때 체포되어 구속되면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1920년대 초에 출소하였다. || [[파일:최린 학병.jpg|width=200]] || || 학병 권유를 하는 최린. || 이후 [[민족]] 개량주의 노선으로 걸어갔는데 1933년 말 [[대동아 공영권|대동방주의]]를 내세우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1938년 조선총독부 어용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이 되었으며 1939년 '조선임전보국단'의 단장이 되었다. 이외에도 강연회를 통해 일본이 벌이는 [[전쟁]]에 [[조선인]]이 참여하는 것을 독려하고 [[중일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으며 '조선언론보국회'라는 [[친일]]단체까지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에 그가 쓰던 [[창씨개명|창씨명]]은 '가야마 린(佳山麟)'[* 崔를 파자하여 지음.]이였다. 변절 이후 [[한용운|만해 선사]]의 어린 [[딸]]에게 [[돈]]을 쥐어줬는데 사실을 안 만해 선사가 "더러운 돈이다"라는 말과 함께 대노하면서 돈을 빼앗아 최린의 [[얼굴]]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최린은 이런 말까지 남기며 자신이 했던 [[독립운동]]까지 부정했다. >“루스벨트여! 귀가 있으면 들어보라. 내가 윌슨의 자결주의에 속아 천황의 역적 노릇을 하였다. 이 절치부심할 원수야! 이제는 속지 않는다. 나는 과거를 청산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라!”[* 출처: 쟁점으로 본 한국사: 김육훈 지음/ 푸른나무/ 1996년 출간/ 257쪽]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으로부터 발표된 포고령에 따라 조선총독부 중추원 직을 박탈당했다. 이어 천도교 측은 최린의 친일 행각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거부하다가 결국은 영구 제명당하고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고 한다. ||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078273254.jpg|width=100%]] || || 반민특위 활동 당시 체포된 최린(오른쪽). 맨앞(왼쪽) 사람은 인촌 [[김성수(1891)|김성수]]의 동생 [[김연수(기업인)|김연수]] [[경방|경성방직]] 공장 사장. [[http://blog.ohmynews.com/ultraman/154225|다른 사진]] ||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3차례의 공판이 열렸고 이 과정에서 뒤늦게 자신의 친일 행위를 시인하고 솔직한 참회를 했다. 당시 남긴 말로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 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법률)|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거열형|소에 사지를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때 공판정에 같이 있던 [[이광수(소설가)|이광수]]가 "[[개소리|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한 것이다]]"라고 하자 옆에 서 있던 최린이 이광수를 향해 '''"입 닥쳐"'''라며 벽력같은 일갈을 내뱉은 일화도 있었다. 이에 대해 1990년대 나온 [[임종국(1929)|임종국]]의 <한국의 친일파 99인>에서는 그래도 이렇게 회개한 점은 좋게 봐야 한다고 쓴 바 있다. 당시 공판에 나온 친일파들은 대다수가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나는 살고자 친일을 했을뿐 되려 나만큼 나라를 생각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며 정당화(본문에 있는 [[이광수(소설가)|이광수]]와 [[최남선]])하거나 '일본이 [[전쟁]]에서 질 줄 몰랐다.'([[서정주]]), '지금 인재도 희귀한데 다른 놈들 갈구지 말고 차라리 나 한놈만 죽여라.'([[박중양]]), 아예 '날 재판에 세워두는 건 죄다 [[빨갱이]] 새끼다'처럼 큰 소리치고 욕하고 악쓰는 이들까지 있었다.(대표적으로 [[이종형]]과 [[노덕술]] 같은 부류들을 들 수 있겠다.) 1949년 4월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dh_011_1949_04_21_0070|병보석]]을 허가받아 [[석방]]되었다. || [[파일:external/people.aks.ac.kr/PPL_0013536_01_s.jpg|width=200]] || || 말년의 최린. || [[6.25 전쟁]] 때 [[북한]]에 [[납북]]되었고 이후 행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게 없다. 다만 1958년 12월 말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1991년 10월 1일 공개된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 필명 신경완(申敬完))의 구술 기록 참조.[[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1002002391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1-10-02&officeId=00023&pageNo=1&printNo=21769&publishType=0001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