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능진 (문단 편집) === 경찰 활동 === > "남조선에서는 아직도 친일 부역 경찰 출신이 그대로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모양입네다." >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가!" > "다른 건 몰라도 [[북한|북조선]]에선 친일파 청산 하나는 확실히 하고 있지 않습네까?" > "그러게 말이야.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구만기래." > "남조선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갔습네다." > "내 이 놈들을 그냥 두지 안캈어!" 1945년 9월 15일 월남 도중 [[해주시|해주]]에 도착한 최능진은 동지들과 신문을 처음으로 구해서 읽다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때문이었는지 그가 남한지역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뛰어든 곳이 바로 경찰계였다. 능숙한 영어 솜씨를 활용해 [[미군정]]에 스스로 접촉해 얻어낸 첫 직장인 경찰관강습소 책임자로 취임한 그는 곧바로 '해주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다음은 [[조선일보]] 사회부장 출신인 조덕송이 자신의 저서 『머나먼 여로-언론외길 반세기의 증언』(도서출판 다다, 1989) 제2권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 "그가 경찰관강습소 책임자로 취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강습소에 남아 있던 [[조선총독부|일제 총독부]] 경찰 출신자들로부터 사표를 받아낸 일이었다." 친일경찰 청산을 몸소 실천에 옮긴 최능진은 약 한 달 후 미군정이 경무부를 창설하자 수사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 경무부 부장은 [[이승만]]과 밀착해 있던 [[한국민주당]]의 실세 중 한 명이자 그의 옛 동지인 [[조병옥]]이 맡고 있었다. 최능진은 그곳에서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가 친일파 출신을 경찰계 요직에 등용시키는 것을 목격하고 다시 한 번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덕술]]이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에 취임한 것을 비롯해 [[이익흥]], [[https://ko.wikipedia.org/wiki/최운하|최운하]], [[https://ko.wikipedia.org/wiki/최연_(1897년)|최연]] 등 일제강점기에 악명이 높았던 친일경찰 간부들이 요직에 속속 중용된 것이다. 최능진은 곧바로 친일경찰 퇴진을 주장했다. 친일 전력 족쇄 때문에라도 자신들에게 절대 충성하리라 기대하며 그들을 중용했던 [[조병옥]]과 [[장택상]]은 즉각 반발하였으며, 친일파를 적극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 "일본경찰 출신이라고 모두 Pro-JAP(친일파)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Pro-JOB(전직)이었다." - 조병옥 > "경찰은 기술직이므로 어쩔 수 없다." - 장택상 친일경찰 청산문제를 둘러싸고 사사건건 논쟁을 벌이던 최능진과 조병옥, 장택상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46년 10월 1일부터 [[대구광역시|대구]] 일원에서 발생한 [[대구 10.1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진압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10월 7일 『대구지방 소요사태에 대한 경위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좌익세력의 불순한 파괴적 정치활동에 선동되어 일반시민이 가담한 폭동사건'으로 규정했다. 참고로 스티코프의 일기에는 공작금 내용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직접 현지로 내려가서 면밀하게 조사를 실시한 최능진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결국 그의 강력한 요구와 이를 수용한 [[김규식]]의 제안으로 '대구사건의 원인규명과 대책수립을 위한 한미공동회담'이 열렸다. 최능진은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이 직접 조사한 내용을 거침없이 증언했다. 다음은 당시 회담에 참석했던 송남헌 선생[* 김규식의 비서실장으로 [[일제강점기]] 시기 항일단파방송 밀청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룬 적이 있다.]의 증언이다. > "최능진 씨는 폭동을 일으킨 좌익을 철저히 다스려야 하지만, 그런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요인이 경찰 자체에도 내재해 있다고 진술했지요. 다시 말해서 '''일제강점기의 고등계 형사들이 광복 후에도 버젓이 경찰에 몸담고 있어 일반 양민의 원성을 사고 있으니 그들을 숙청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공동회담은 한 달 동안 계속됐고, 공동결의문까지 작성해 미군정의 [[존 리드 하지|하지]] 중장에게 전달했다. 이 결의안에 최능진의 증언이 대부분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12월 5일 하지 중장은 "친일파 출신을 조사해서 경찰에서 배제하거나 파면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한미공동회담의 조선측 대표였던 김규식 등은 조병옥 경무부장의 책임을 물어 그를 즉각 파면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도 이 요구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조병옥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고, 최능진이 그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최능진을 '경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위계질서를 무너뜨린 유해한 인물'로 몰아서 사직을 강요했다. 최능진은 이를 거부하고 한동안 정상근무를 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조병옥의 압력에 밀려 결국 12월 5일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최능진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대(對) 조병옥 성명서』를 발표하며 조병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다. > '''"귀하는 당연히 현직을 사퇴하여 3천만 민중 앞에 고두(叩頭) 사과하는 동시에, 속죄의 의미로서 [[8.15 광복|8.15]] 이후 불의(不義) 취득한 재산을 전재(戰災) 동포를 위하여 제공한 후 광복 전의 애국자 조병옥으로 돌아가기를 충고한다."''' 이에 맞서 조병옥과 장택상도 최능진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몇 차례 공개적인 성명전이 오가면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당시 조병옥의 인기가 바닥이었던지라 시민들은 최능진에게 절대적인 지지의 박수를 보냈다. 특히 최능진이 마지막 성명서에서 "조병옥, 장택상 씨가 경찰 행쟁을 한민당의 책동에 의하여 자행해 온 것은 사실이다. (중략) 일제 주구가 일조일석에 애국자가 되어 민중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고 일갈하면서, 서민 대중 사이에서 최능진은 큰 지지를 받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