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능진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 === 최능진은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에서 부유한 지주이자 [[기독교]]도인 최경흠(崔敬欽)의 4남으로 태어났다. 출신 성분이 부유한 [[지주#s-2]]이긴 했지만 집안의 분위기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우선 그의 두 형 [[최능찬]]과 [[최능현]]은 평안남도 사천리(沙川里 : 현 [[증산군]] 사천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주도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은 전력이 있다. 특히 최능현은 감옥에서 탈출해 중국으로 건너가 윤봉길 의사와 함께 폭탄을 제조하는 실험을 하다 폭발사고로 생명을 잃기도 했다. 1915년 [[평양시|평양]] 숭실중학을 졸업한 최능진은 [[중국]]으로 건너가 금릉대학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191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프링필드대학과 [[듀크 대학교|듀크대학]] 체육학과에서 수학한 뒤 4년 만에 졸업한 그는 [[워싱턴 D.C.|워싱턴]] [[YMCA#s-1]] 체육담당 간사를 맡는 한편 도산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 운동에도 참여했다. 흥사단에 가입한 최능진은 [[사대주의]]적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독립운동 세력 내에서의 [[파벌|파벌주의]]와 [[분열#s-1|분열주의]] 조장 등 [[이승만]]의 정치행태를 지켜보며 이때부터 '반(反) 이승만' 노선을 견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30세가 되던 1929년 귀국해 평양숭실전문학교 체육과 교수로 부임한 최능진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징역 2년(구류 통산 190일)형을 언도받았다. 공교롭게도 [[조병옥]] 또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그의 감옥 동기였는데, 이들이 해방 이후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 최능진은 1945년 광복이 오자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 위원장은 [[조만식]], 부위원장은 현준혁이었다.] 치안부장을 맡았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러나 그해 9월 3일 발생한 [[현준혁]] 암살사건으로 우익 세력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자 이틀 후 10여 명의 추종자와 함께 38선을 넘는다. 그가 [[월남#s-2]]한 데는 서울에서 정당 활동을 하겠다는 동기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