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남선 (문단 편집) == 여담 == *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 당시 허구의 이야기인 [[백두산]] 7회 등정설, [[전국]] 답사설, 옥사설을 퍼트린 원흉이다. 그 시초가 동아일보에 투고한 고산자를 회함이고 10년 후 조선어독본을 통해 저 낭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 오직 친일 역사학만 판 것은 아니고 일단은 역사학자라 오랫동안 정체가 잊혀져 있던 [[신라]] [[진흥왕]]의 [[마운령 순수비]]를 [[고증]]해내기도 했다. 또한 "19세기 조선 최고의 백과사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게 했다. 사연은 다음과 같은데 1920년대 중반 어느 겨울밤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국어 운동에 기여했던 권보상[* 당시 최초로 책을 구입한 사람은 최남선이 아니었다. 관련 정보 [[http://anthropo.tistory.com/tag/%EC%98%A4%EC%A3%BC%EC%97%B0%EB%AC%B8%EC%9E%A5%EC%A0%84%EC%82%B0%EA%B3%A0|#]],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21907.html|#]]]은 군밤을 사먹는데 군밤장수가 싸주는 [[종이]]가 이상해서 보니 고서였다고 한다. 이를 뭉치째로 사 조선광문회로 가져가서 검토를 한 결과 책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로 판명났는데 조선광문회가 해산되면서 <장전산고>는 최남선의 장서가 되었다. [[한국 전쟁]] 때에도 보따리에 싸들고 피난왔지만 최남선이 소장한 원본은 영인하지 못한채 [[6.25 전쟁]]으로 불타버리고 대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필사본만 남아 전해지게 되었으며 1~4권은 낙질되어 나머지 56권만 남았다. * [[군밤]]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 [[군것질]]을 하는 버릇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유난히 최남선은 군것질을 좋아해서 주머니 속에서는 시조 원고 외에도 항상 [[호떡]], 군[[밤(열매)|밤]], 완두[[콩]], [[땅콩]] 등을 넣어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하루는 [[보성전문학교]]에서 [[역사]] 관련 강연을 했는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다가 군밤 몇 톨이 강단 아래로 떨어졌고 그날 이후 학생들은 최남선이 지나가는 걸 볼 때 마다 "군밤선생"이라고 [[애드립]]을 치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 어린이 잡지인 <붉은 저고리>를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독특한 것이 4컷 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를 '다음엇지'라는 순 우리말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즉, 다음엇지란 말은 "다음에 어찌될까"라는 뜻인데 "이것은 차례차례 보아가는 웃음거리 그림이니 첫째 그림을 자세히 보아 그 뜻을 짐작하고 다음을 보시면 설명이 없어도 재미있게 알아보시라" 라고 편집자가 창간호에 밝히고 있었다고 한다.[[http://www.presseum.or.kr/bbs/board.php?id=cartoon&p_choice=&p_item=&code=&page=3|#]] <붉은 저고리> 외에도 다수의 잡지와 신문 창간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재홍]]과 함께 <시대일보>를 창간하기도 했는데 안재홍은 후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지만[* <시대일보>라는 것도 문제가 많다. 일단 처음 창간한 것은 잡지 <동명>인데 여기에 얽힌 인물이 1급 친일파인 [[진국주]]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고문 아베이다. [[http://www.brainrespiration.co.kr/06club/club_board_view.asp?id=2388&_club_code=history&code=B0020&cpage=14&sel_key=&skey=|#]] 때문에 여기 얽힌 인물들인 [[염상섭]], [[현진건]] 등에 대해서 모두 친일파 논란으로 끌어들였을 정도이다(이 중에서 현진건은 이 시기 무명이었고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이후에 터졌기 때문에 제외. 안재홍 역시 이후 활동에서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그나마 멀어졌지만 <만선일보>에서도 활동한 염상섭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위에 언급된 만선일보 등과도 유사한 사례이다. 때문에 <동명>이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폐간되었다거나 자금 조달을 막아서 <시대일보>가 폐간되었다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는 신빙성이 낮다. 심지어 조선총독부의 자금 지원에도 불구하고 경영난에 처한 <시대일보>를 [[증산도]]의 일파인 [[보천교]]에 팔아넘기려는 시도까지 했기 때문에 결국 시대일보는 [[홍명희]]에게 넘어갔다가 결국 파산해서 무너진다. 때문에 이런 전말을 강하게 평가하는 이들은 최남선이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변절한 시기를 1920년대까지 올려잡는다.] 친일파 논쟁과는 별개로 역시 친일파인 [[윤치호]]에게 찾아가서 <시대일보>를 설립하도록 돈 내놓으라고 성화인데 돈도 없고 어차피 상황상 망할거[* 이유는 당시 <동아일보>보다 적극적으로 일본을 까면 폐간당할 것이고 일본에 그 정도로 나가지 못하면 <동아일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해서 결국 망할거라는 이유였다. 돈 없어 [[드립]]은 윤치호가 항상 입에 달고 살던 이야기라고 해도 이 분석은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평가였다.]라고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윤치호 일기>에 나온다. * 심산 [[김창숙]] 선생은 [[대전광역시|대전]]형무소에 수감 당시 교도소장이 육당이 쓴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을 갖고 와서는 감상문을 쓰라고 하자 첫 몇 장을 읽더니 책을 교도소장에게 던지며 “나는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요란하게 짖어대는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 [[기미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사람이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죄가 남는다”라고 호통친 일화도 유명하다. * [[책]]에 대한 욕심이 상당하였다는 증언도 있는데 [[최태영]]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황해도]] 지역 절에 보관된 고서들을 많이 가져갔다고 하며 그 외에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린 후에는 절대로 반환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내에 있던 책들을 많이 수집했다고 하는데 6.25 전쟁 직전까지 모은 책이 무려 17만 권이지만 안타깝게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전부 불타버렸다고 한다.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책을 쓰던 중에 자료 참고차 다시 서울로 갔는데 전부 불타버린 것을 보고 절규했다고 한다. 만약 불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면 한국 역사를 몇 번은 다시 써야 했을 것이다. 6.25 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계속 책을 모아서 2만여 권 정도를 모았는데 [[고려대학교]]에 [[기증]]했다고 한다.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5-1번지에 고택 '소원(素園)'이 있었는데, 1939년 인쇄소 '신문관' 자리에 세워져 최남선이 1941년부터 11년간 거주했다. 한동안 최남선 유가족 소유였으나 2002년 차남 최한웅 교수가 사망한 후 부지가 두온종합건설에 매각됐고 2003년 1월 25일 철거되어 그 자리에 저층 [[아파트]]형 빌라가 들어섰다.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 측이 밝힌 철거 사유로는 "1939년 이래 고택은 세월이 흘러 원형을 잃었고 일제 말 최남선이 해당 고택에 살면서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논설]] 등을 썼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최남선 [[후손]]들과 광복회 등이 보존할 필요가 없다고 진정서를 냈던 것도 이에 한몫했으며 고택에 남아 있던 최남선의 서신 등 잔존 유품들은 현대사 연구가, 고서적 수집상, 관련 동호회 회원 등이 전부 가져갔다.[* 반면 최남선 유품 중 보존 가치가 있는 것은 이미 1960년대 중반에 대학 [[박물관]] 등 전문 기관에 기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