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광도 (문단 편집) == 창시 == 최광조는 일찌기 소년 시절부터 무술을 배웠는데, 체구가 왜소했기 때문에 해방과 6.25 직후 ~~헬게이트~~ 혼란한 시대에 자기방어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구 이동주 관장에게 권법을[* 이때는 태권도가 성립하기 이전이라 권법, 공수, 당수 등 용어가 뒤섞여 쓰였다.] 배웠고, 군대에서 무술 사범으로 활약했다. 이때 [[최홍희]] 총재의 명성을 듣고는 제대 이후 최홍의 총재를 만나 [[국제태권도연맹|ITF]] 태권도 사범이 되었다. 1967년 태권도 시범단의 일원으로 동남아시아를 순방하며 태권도를 전파했다. 최홍희가 국내 태권도계의 파벌 싸움에서 밀려 결국 해외로 나난 뒤 [[북한]]과 접촉하며 ITF를 키우려고 하자, 최광조는 6.25를 겪은 인물로서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최홍희와 결별하고 독자행보를 걸었다. 태권도 사범이었던 최광조가 자신의 이름을 딴 무술을 만든 이유는 '''부상'''이었다. 최홍희를 따라 전 세계를 돌며 시범을 보이고 수련했는데, 이 와중에 무리한 시범과 수련으로 몸이 망가졌던 것.[* 사실 시범용으로 딱딱 끊어지는 발차기나 펀치는 보기에는 멋있지만 관절에는 안좋다. 특히 발차기를 할 적에 무릎을 쭉 펴서 차고 회수하는 동작이 빨라질수록 무릎 관절에는 부담이 간다. 지금도 태권도 선수들이 고질적으로 다치는 부위이다.] 오죽하면 하도 파스를 붙여서 사람들이 '메디슨 최'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 부상이 계속 악화돼서 결국 무릎을 쓰기 어려울 정도가 되자 태권도 시범은커녕 일상생활도 힘들어졌다. 최광조는 이렇게 고통에 시달리다 못해 한때는 자살까지 결심했다고 하는데, 결국 부상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평생 수련한 태권도를 접고 줄곧 '''재활'''운동에 매진했다. 인체해부학, 근육학, 생리학 등을 조금씩 공부하며 차츰 건강을 회복했다. 1978년부터 86년까지 9년 동안 얻은 지식과 경험을 모아 수련자가 장기적으로 수련해도 몸에 무리가 오지 않는 건강한 무술, 사실상 '''재활운동'''의 개념으로 만든 것이 최광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