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초한전쟁 (문단 편집) === [[진승·오광의 난]] === >'''"진승이 왕이 되어 초나라는 크게 일어날 것이다.(大興楚, 陳勝王)"''' > 公等遇雨,皆已失期,失期當斬。藉弟令毋斬,而戍死者固十六七。 >너희들은 비를 만나 모두 기한을 어겼고 기한을 어겼으면 참수를 당할 것이다. 참수를 당하지 않더라도 (수자리) 지키는 사람 열 명 중 예닐곱 명은 죽을 것이다. > >且壯士不死即已,死即舉大名耳,'''王侯將相寧有種乎'''! >또 장사(壯士)란 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죽는다면 명성을 드러내야 할 뿐이다. '''[[왕|왕(王)]], [[제후|후(侯)]], [[장군|장(將)]], [[재상|상(相)]]의 [[왕후장상 영유종호|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 >---- > - '''사기(史記)·진섭세가(陳涉世家), 권중달의 [[자치통감]] 1권 번역본. (pp403)[* 이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문장은 일반 민중에게, 특히 난을 일으키는 민중에겐 하나의 캐치프레이즈로 작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고려]] [[무신정권]] 때의 [[만적의 난]]에서도 이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반도로도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앙]](商鞅) 이래 진나라의 법치주의는 진시황의 시대에 [[이사(전국시대)|이사]](李斯)를 거치면서 절정에 달했다. 법률은 무엇보다도 가장 위였고, 이는 지나치게 가혹한 면이 많았다.[[https://youtu.be/4mPLDqUUKoE?t=486|#]]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ds/200910/05/89/f0043889_4ac941ca44bd8.jpg|width=100%]]}}} || || {{{#000000 '''인부들을 선동하는 진승''' }}} || 시황제가 죽은 이듬해인 기원전 209년, 하남성 출신인 [[진승]](陳勝)은 자신의 동료인 [[오광(초한쟁패기)|오광]](吳廣) 등 징용된 900여명과 함께 현재의 [[베이징]] 부근인 어양(漁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행이 대택향(大澤鄕)에 이를 무렵, 마침 큰비가 내려 도로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별수 없이 발이 묶이게 되었는데, 당시 진나라의 법률로는 목적지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무조건 목을 베어버리게 되어 있었으니, 어차피 도망쳐도 죽고 늦게 가도 죽게 되는 상황이 되자 진승과 오광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인부들을 선동하기 시작했고 인부들도 동조하여 인솔하던 관리들을 모두 죽여버린다음 반란을 일으킨다. 진승은 장초(長楚)라는 국호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 [[파일:external/a4.att.hudong.com/01300000316583122899173048345.jpg]] || 만일 그렇게 가혹한 법률이 없었다면 [[진승·오광의 난]]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되는 자료도 존재하는 것이, 당시에 살았던 진 하급 관료의 무덤에서 발견된 죽간에 수록된 것은 이렇다. "부역에 징발된 인원이 도착하지 않으면 담당자에게는 2갑의 벌금. 3일에서 5일까지 늦으면 견책. 6일부터 10일까지는 1순의 벌금. 10일을 넘기면 1갑의 벌금." 참고로 갑이 순보다 높은 단위다. 이상을 볼때, 보통 알려진 것처럼 진의 법률은 수틀리면 사형이라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나름 고도의 체계를 갖춘 것으로, 후대의 곡가필을 감안한다면 죽지는 않아도 높은 벌금을 물수밖에 없었든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반란이 되겠다는 진승 오광의 판단이 앞섰다는 가능성도 열어둘 수 있겠다.][* 아래 주석에도 언급하지만, 한대의 법률은 진의 그것을 큰 차이 없이 계승한 것으로, 단지 법가 대신 도가를 표방한 무위지치의 통치로 진보다 좀 더 느슨한 적용을 행한 것이다. 진의 멸망 원인은 단순히 가혹한 법률과 그에 대항한 민중이 아니라, 고대 국가의 제한된 통치력과 고작 15년의 기간으로는 분리되었었던 전국 400년의 세풍을 수습할 수 없었으며 이를 보듬어줄 정책 또한 미비했음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설령 진나라의 가혹한 법률이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았다 한들, 명백히 저런 죽간같은 기록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그런 뻔한 프로파간다를 고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나라를 거치며 진나라=가혹한 법률로 내려왔음을 보면 진나라에 대한 증오가 상상초월이었음을 알 수 있는것이다.] 또한, 진나라의 지배력이 강고하다면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났다고 해도 [[모기]]가 물어대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서자 전국에서 이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퍼져 나갔다. 특히 당시 진나라 36개 군과 그 밑의 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있었는데, 혹독한 관리들에게 고통받던 백성들은 불만이 폭발하여 모두 들고 일어나 그들을 죽이고 난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불어났다. 호해가 상황 파악이 늦기도 했지만 계포의 평가에 따르면 [[진시황]]이 흉노 원정 등으로 국력을 축내놓은 탓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면도 있었던 듯. [[장한]]만 해도 수도에서 당장 동원할 군대는 형벌부대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승은 결국 일개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반군 세력을 통합하여 하나로 통솔할 수 있는 권위가 없었다.[* 역사학자 공원국은 이 부분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았는데, 핏줄도 핏줄이지만 전투에 있어 농민출신이었던 진승은 말도 전차도 몰 수 없었고, 이는 장군으로서의 권위를 세울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음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그것. 등자가 없던 시절이기도 하고 등자가 발명된 이후로도 동서양을 불문하고 농경사회에서 승마는 귀사족들의 특권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다.] 육국의 후손들은 진승에게 굳이 복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부하들도 점점 진승을 이탈하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장이와 진여는 먼저 진을 쳐서 쓰러뜨릴 것을 권했으나 일개 농민에 불과했던 진승은 그보다는 왕 자리에 오르는 것을 우선시했다.] 이 와중에 나중에도 사고를 치는 '''[[괴철]]'''은 [[무신#s-3]]이란 장수가 성 수십개를 함락시키자 '이 기회에 진승의 군사를 훔쳐서 독립해버리자'며 꼬드겼고, [[무신#s-3]]은 진짜로 독립했다가 자기도 똑같은 수법으로 군사를 도둑맞은 후 어이없이 부하에게 죽는 등 장초 세력은 개판 오분전이 된다. 결정적으로, 함곡관을 넘어 진나라의 수도 [[셴양시|함양]]으로 진군하는 주문(周文)의 병력을 진나라의 [[명장]] [[장한]](章邯)이 격파하면서 진승의 지위는 크게 흔들리게 된다. 기세를 탄 장한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