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초소왕 (문단 편집) == 수도가 함락 당하다 == 초 소왕 4년(기원전 512년), 오왕 [[합려]]는 2년 동안 국력을 키운 뒤 오자서, [[손무]], [[백비]], 공자 부개와 함께 초나라를 침공했다. 이때 서나라와 종오국을 쳐서 공자 엄여와 촉용을 죽여버렸다. 그후 오왕 합려는 초의 수도 영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손무가 간했다.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닙니다." 오왕 합려는 그 말을 옳게 여겨 따랐다. 초 소왕 5년(기원전 511년), 오나라가 육읍과 잠읍을 점령했다. 초나라의 사마 심윤술(沈尹戌)[* 달리 심윤수라고 하는데, 아마 戌자와 戍자와 비슷하게 생겨서 두 가지 표기가 쓰이는 듯 하다. 이것과는 상관없지만 달리 예를 들자면 [[진목후]]의 이름이 많은 원인도 비슷한 모양의 글자가 많은 탓이기도 하다. '심윤'은 심 지방의 장관을 뜻하는 직책이고, 성은 미(羋), 이름은 술이었다. 심윤술은 심윤을 씨(氏)를 삼아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심나라의 후손으로 알려진 사람으로서 한때 오나라에서 합려를 섬긴 적이 있었지만 초나라로 돌아와 심 지역에서 오나라 전문가로 10년 넘게(죽을 때까지) 대오 전선을 담당하였다.]은 잠읍을 구하러 갔다. 초 소왕 7년(기원전 509년),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여긴 소왕은 영윤 낭와(囊瓦)를 보내 오나라를 치게 했으나 예장에서 탈탈 털렸다. 초 소왕 10년(기원전 506년) 봄에 [[진(희성)|진(晉)]], [[제(춘추전국시대)|제]], [[노나라|노]], [[송(춘추전국시대)|송]], [[채나라|채]], [[위(춘추전국시대)|위(衛)]], [[진(규성)|진(陳)]], [[허나라|허]], [[조나라|조]], [[당]], [[주나라|주(邾)]], 돈, 호, 등, 실, 기, 소주 등 제후국들이 힘을 합쳐 초나라를 치는 와중 오왕 [[합려]]는 5,000명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대별산맥을 넘어서 수도인 영(郢)을 급습했다. 이때 낭와는 중앙군을 거느리고 심윤술의 계책[* 영윤 낭와가 한수에서 오나라의 도강을 견제하면서 시간을 끌면(모루) 심윤술이 초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정예병으로 오나라의 후방을 치는(망치) 계책.]에 따르기로 하고는 독자적으로 거짓후퇴를 하는 오군을 추격하다가 대별산맥 초입에서 3번 대패하고 흩어지는 군대를 추슬러서 백거(柏擧)에서 대항하며, 심윤술의 군대를 기다렸지만 합려의 동생 부개의 돌격에 의해 또 한번 와장창 무너지고 후퇴하면서 청발수(淸發水, 한수의 지류)를 건너다가 얻어터지고, 후퇴하다가 배고파서 밥짓는데 또 다시 급습당한 끝에 결국 수도 영의 인근 옹서에서 완전히 와해되었다. 패장 낭와는 몸성히 주변의 소국으로 튀었고, 심윤술은 옹서까지 군대를 겨우 이끌고 갔으나 장거리 행군에 피로한 초군이 오나라에게 대패하였고, 이때 장렬히 전사하였다. 백거에서 대치한지 10일만에 수도인 영이 함락되자, 초 소왕은 운(鄖)나라를 거쳐 속국인 [[수나라|수(隨)나라]]로 달아났다. 《좌전》에는 이때 소왕이 오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코끼리 꼬리에 불을 붙여 오군 진지로 코끼리를 내달리게 해 오군을 혼란에 빠뜨린 기록이 남아 있다. 어떻게 보면 [[전단(전국시대)|화우지계]]의 원조. 왕의 서형인 [[공자 신]]은 왕의 복식을 갖추고 수도 영의 인근 비설(脾洩)에서 일종의 분조를 이끌면서 초나라 사람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한 오군은 대규모의 약탈, 방화, 강간 등의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당시에도 그 행위가 욕을 먹지만, 오히려 병사들에게 사기를 올려주는 행위로 사용되었다. 즉 일종의 포상으로 이런 행위를 한 것이다. [[전국시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지 않고 민심을 다독인 [[악의(전국시대)|악의]]가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시대 불문하고 악의 같은 행위를 해야 욕 안먹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전공이나 전리품을 다투면서 규율이 무너진 모습이 보였다. 오자서의 친구인 신포서는 이 위기 상황을 보고 있을 수 없어 진(秦)나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했으나 당시 진나라의 [[군주]]인 [[진애공(영성)|진애공]]은 초나라는 신의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7일간이나 부탁하자[* 진애공은 남의 나라에 간섭하기 싫어서(덤으로 진애공의 누이를 태자비이자 미래의 왕후로 삼는줄 알았는데 강제로 빼앗아 후궁으로 취한 초 평왕 때문에 진나라 공실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도 한몫했다.) 그냥 좋게 좋게 신포서를 돌려보낼려 했는데 신포서는 장장 7일간 죽기 일보 직전까지 곡을 하며 진심을 보였고 결국 진애공이 구원군을 보내준다.] 그 정성에 감복한 애공은 초나라에게 원군을 보낸다. 진(秦)나라 군대는 신포서와 함께 영으로 갔다. 이때가 바로 초 소왕 11년(기원전 505년)이었다. 또한 초나라에게 호재가 일어났는데, 바로 오나라의 왕제 부개가 딴 마음을 품고 왕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켜서 오왕 합려가 물러난 것이다. 이로써 초나라는 기사회생하였지만 수도 영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오자서가 물러나는 조건으로 태자 건의 아들인 왕손 승을 우대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초 소왕이 이를 받아들여 왕손 승을 백공으로 임명한다. 허나 이것은 훗날 화근이 된다.[* 초 혜왕 때 백공 승은 기어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심윤술의 아들 [[심제량]]에게 진압된다. 이 백공 승도 오자서에게 배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대단히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지팡이를 거꾸로 잡아서 끝이 턱을 찔러 피가 나는데도 집에 돌아가서야 알았다는 일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