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초(춘추전국시대) (문단 편집) === [[춘추시대]] === [[주나라]] [[성왕]] 때 [[웅역]]이 자남(子男)의 작위와 영토를 하사받아 제후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원의 국가와는 다른 기원의 국가일 확률이 높다. 당시 [[양쯔강|장강]] 이남은 밀림으로 뒤덮인 이민족의 영역이었으며, 고고학적 발굴로도 초기 초나라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묘족]]의 나라임이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애초에 楚라는 글자에 숲을 뜻하는 林이 들어가 있는 것도 당대의 이 지역의 환경을 짐작케 한다. 중원에 위치한 국가들로부터 남방의 오랑캐로 불려 무시를 당하여 형만(荊蠻, 형나라 야만인들)이라 하였으며 각종 사서의 기록을 보면 이들을 멸시하는 의미로 형(荊)나라, 형초(荊楚) 등으로 쓰였다. 원래부터 중원으로부터 파생된 국가가 아니라,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화 문명이 전파됨에 따라 중화 문명권에 편입된 국가로 보인다. 주나라 소왕 때는 초나라를 정벌하러 가다가 배가 침몰해서 물에 빠져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소왕은 재위중에 몇번이고 초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전부 실패한 것은 물론 국력까지 갉아먹어 성강지치는 소왕을 끝으로 기울게 된다.] 무왕 대부터 왕을 칭하여[* 춘추시대 중원의 나라들은 주나라를 업신여기더라도 감히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지는 않았는데 남방의 '오랑캐' 나라인 초나라·[[오(춘추시대)|오나라]]·[[월나라]]는 그에 구애받지 않아서 당당하게 왕을 칭했다. 이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46771&cid=796&categoryId=1535|문정(問鼎)의 고사]]가 나오기도 했다.]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키며 세력이 강성해졌고 서서히 북으로 진출한다. 성왕 대에는 [[제(춘추전국시대)|제(齊)나라]], [[진(희성)|진(晉)나라]]가 이끄는 중원의 연합군과 대립했으나 끝내 진(晉)을 이기지는 못하였고, 시간이 흘러 [[초장왕]] 대에 진나라를 꺾고 전성기를 누린다. 춘추시대는 대체로 중원의 맹주인 진과 북진하는 남방의 초의 대립으로 압축된다.[* 춘추시대 후기의 오월의 대립도 결국 진초의 대리전이다.] 그러나 춘추시대 후기에 이르러 초 장왕의 아들인 [[초공왕]] 때부터 패권이 기울기 시작하더니[* [[언릉 전투]]에서 패배하며 진나라가 패권을 되찾았다.] [[초영왕]]의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이 기울고 초 공왕의 막내 아들인 [[초평왕]] 대에는 [[오(춘추시대)|오(吳)나라]]의 공격을 받아 불안불안하다가[* 초평왕은 비록 후계자 문제로 일을 그르치고 오나라의 공격으로 국력을 깎아먹었지만 [[월나라]]와 결맹을 맺어 후일을 도모할 기반을 만들었다.] 평왕의 아들인 [[초소왕]] 대에는 [[오(춘추시대)|오]](吳)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점령당할 정도로 쇠퇴하였다.[* 이때 [[오자서]]의 친구로 알려진 신포서가 [[진(영성)|진(秦)나라]]의 병사를 빌려 오나라 군대를 물러나게 한다. 그 덕에 멸망은 피할 수 있었다.] 기사회생한 소왕은 약(若)으로 천도해 나라를 재건해나갔으며, [[초혜왕]]은 [[채나라]]와 [[진(규성)|진(陳)나라]]를 합병하고 [[초간왕]] 대에 이르러서는 거나라를 점령하며 초나라가 건재함을 천하에 과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