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첼시(런던) (문단 편집) === 유래 === 첼시의 어원은 Chelchehithe.[* [[고대 영어]]로 석회암이 들어오는 항구란 뜻.] 기록에 처음 등장한 건 787년 [[칠왕국]] 시기 [[머시아]] 왕이 설치한 [[장원(농업)|장원]]으로서다. 머시아 왕은 첼시에 지방 법원을 설치하고 리치필드 교구를 둬 매년 365냥의 금화를 교황에게 보내도록 했다. 그것이 당시 영국이 교황에 내는 세금이었다고. 웨스트민스터 주교 공관도 첼시에 있었다. [[노르만 왕조]] 이후 솔즈베리 백작 겸 켄싱턴 백작 오브리 드 베어(Aubrey de Vere)가 봉토를 받은 1086년에 다시 첼시가 등장한다. [[헨리 8세]]는 1536년 산디스 경에게서 첼시를 뺏어 직할로 두고 별궁을 지어 아내들을 차례로 살게 했다.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첼시 별궁에서 태어났고 [[토마스 모어]]도 첼시를 거쳐갔으며[* 1520년 Beaufort House란 과수원이 딸린 대저택을 짓고 업무에 지칠 때마다 와서 쉬었다고. 보퍼트 하우스는 그가 처형된 후 몰수되고 여럿 주인이 바뀌다 1740년에 헐려 1766년 보퍼트 스트리트란 거리 이름이 돼 현재에 전한다. [[호주]] [[퍼스]]에도 동명의 거리가 있다. 여담으로 1528년 토마스 모어가 보퍼트 하우스 근처에 지은 작은 가톨릭 예배당은 그의 무덤을 겸하다 1940년 나치 공습에 사라진다.] [[제임스 1세]]는 첼시에 신학대학[* King James' College at Chelsea. 1682년 [[찰스 2세]]가 헐고 왕립 첼시 병원을 지었다.]을 지었다. 1694년부터도 런던의 부촌이었고 많은 별궁들이 세워져 호화로움을 뽐냈다. 그러나 아직 런던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던 시절이라 텃밭, 과수원이 있기도 한 인구 3천 정도의 교외였다. 본격적으로 인구 붐이 일어나고 번화가가 되기 시작한 건 현재 리틀 첼시로 불리는 지역에 신시가지가 들어서고 풀럼까지 가도가 연결돼 항구가 생긴 1700년대부터였다. [[찰스 2세]]는 현재 킹즈로드라 불리는 거리를 닦았고 풀럼까지 왕도[* 훗날 [[조지 4세]] 때까지도 왕만 다닐 수 있는 도로였다.]를 놓았다. 첼시 구청도 번듯하게 들어섰고 공립 도서관도 설치돼 문화적으로도 융성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를 기록한 브리태니커 사전엔 '(첼시의) 동쪽에 더 좋은 거주 조건이 구비돼 있으며 서쪽의 슬로언 거리부터 템스강을 따라 풀럼 가도까지 연결되는 곳 주변은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기록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