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르케스인 (문단 편집) === 전근대 === || [[파일:Sindi.Warrior.jpg|width=80%]] || || [[1896년]] [[타만 반도]]에서 발견된 신드족 전사 [[석상]]. 현재 [[크림 공화국]]에 위치한 케르치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기원전 1000년경 흑해 동쪽 연안에 자리잡은 이란계 유목민 [[스키타이]] 부족 중 하나인 '''신드족'''(Σινδοί)이 [[아조프해]] 연안의 원주민 '''메오트인'''(Μαιῶται)[* [[아디게어]]로 МыутIэхэр. 이들은 체르케스인과 압하스인, 아바자인의 공통 조상격 되는 민족이다.]을 정복하여 기원전 5세기경 '''신디케'''(Σινδική) 또는 '''신디카'''(Синдика)라는 국가를 세우고 [[흑해 그리스인]]의 식민 도시들과 무역을 한 것을 이들의 시초로 본다. 이들은 그리스인들뿐만 아니라 [[스키타이]]와 [[사르마티아]] 같은 이란계 유목민들과 꾸준히 통혼하면서 오늘날의 체르케스인들의 기원이 되었다. 이들 체르케스인들은 기원전 3000~2000년경에 [[아나톨리아]] 반도에 살았던 비 [[인도유럽어족]]계 선주민들인 [[하티|하티인]][* [[히타이트]]의 명칭이 이들에게서 유래했다. 히타이트인은 [[원시 인도유럽인]]의 분파가 [[캅카스]]를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에 유입되면서 현지의 [[하티|하티인]]들을 정복하고 동화시키면서 성립된 민족이다.]과 친연 관계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체르케스인의 분파 중에 하투콰이(Хьатыкъуай)[* [[아디게어]]로 [[하티]]의 아들, 하티의 남자를 뜻한다.]라는 부족이 있거나 체르케스인들의 성씨 중에 하티인이라는 뜻의 접두사인 'Hath-'가 붙은 성씨가 많다는 점이 그 근거로 꼽힌다. 때문에 고대에는 [[캅카스]] 밖에도 체르케스인들이 대거 거주했다고 추정된다. 서기 3~5세기 사이 [[동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체르케스인들은 여타 캅카스 민족들처럼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나 [[이웃나라]]인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다르게 기독교가 깊이 뿌리내리지는 못하고 토속 신앙과 기독교가 공존하는 [[봉건제]] 사회를 유지하였다. 정치적으로 제대로 통합되지 않은 채 여러 개의 부족국가들로 나뉘었던 체르케스는 [[하자르]]와 뒤이어 하자르로부터 독립한 [[오세트인]]들이 세운 국가 알라니아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서기 10세기경 북서캅카스의 체르케스인 부족연맹이 크림 반도와 인접한 타만 반도에서부터 오늘날의 투압세(Туапсе) 시와 인접한 네쳅수호(Нечепсухо) 강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했다. 부족연맹은 흑해 동부 연안의 [[소치|샤차]](Шъачэ)를 수도로 삼아서 '''아더가 하쿠'''(Адыгэ Хэку) 또는 '''체르케시야'''(Черкесия)라는 국가 형태로 발전했다. 특히 '''체르케스인들 중에는 미인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하렘에도 체르케스 여성들이 많이 들어갔지만 체르케스인들은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맘루크로 더 유명했다. [[크림 타타르]]인이 형성되기 전부터 크림 타타르인의 선조인 [[쿠만]]족들이 이들을 계속 습격하고 약탈하여 많은 체르케스인들이 중동에 [[노예]]로 팔려가 노예 군인인 [[맘루크]]가 되었다. 흑해 연안과 캅카스 출신 맘루크들은 역사적인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 서정군을 대패시켰으며 [[아크레]]와 [[야파]]의 십자군 잔여 세력을 전멸시켰고 체르케스 맘루크들은 이집트에서 바흐리 맘루크 왕조의 뒤를 이어 부르지 [[맘루크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약 15세기부터 이웃한 [[킵차크 칸국]]의 분파 [[크림 칸국]]의 약탈과 노예 사냥에 오랫동안 시달렸던 체르케스인들은 이를 막을 목적으로 17세기 무렵에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지속적으로 공물을 바쳤으나 크림 타타르인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체르케시야의 중심부까지 침략했으며 체르케스 신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던 오스만 제국은 오히려 이를 방치해 버려 많은 체르케스인들이 노예가 되는 데 일조했다.[* 체르케시야 동부에 위치한 카바르다 측은 이에 분노해 크림의 칸과 오스만 술탄에게 더는 경의를 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1708년]] [[https://en.wikipedia.org/wiki/Kanzhal_War_(1708)|칸잘 전쟁]]에서 카바르다로 침략을 가한 2-3만 명 규모의 크림-오스만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까지 했다. 해당 전쟁은 체르케스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언급된다.] 16세기 경 카바르다의 대공 템류크 이다르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던 크림 칸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의 딸 마리야 템류코브나를 [[루스 차르국]]의 '뇌제' [[이반 4세]]의 두번째 황후로 시집을 보내 당시 러시아와 결혼 동맹을 맺고, [[타타르인]]들과 전쟁을 벌였다. 이때 체르케스인들은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공격하던 루스 차르국에 지원군을 보내 이 지역들이 러시아에 병합되는 데 기여했다. 당시 템류크 이다르는 다게스탄의 샴할(Шамхал)[* [[쿠미크어]]로 Шаухал/Şawhal. 서기 8~19세기 사이 다게스탄과 북동캅카스 지역의 실세격 민족 [[쿠미크인]] 통치자들을 일컫는 [[칭호]].]들이 다스리던 [[https://en.m.wikipedia.org/wiki/Shamkhalate_of_Tarki|타르키 샴할국(Таргъу Шавхаллыкъ)]]에 대항하기 위해 1557년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반 4세는 러시아의 남진을 위한 요충지 확보를 목적으로 여러 카바르다 족장의 아들들을 볼모삼아 교육시키는 등 서서히 북캅카스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나 곧 이반 4세가 세상을 떠나고 [[표도르 1세]]를 대신해 [[보리스 고두노프]]가 실세가 되어 권력을 잡아 카바르다 측과 연합하여 다게스탄 지역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3천 명이 전사하고 군 전체가 와해되는 대패를 겪고 당시 다게스탄의 뒷배였던 [[사파비 제국]]의 중재 아래 북캅카스에서 발을 뺐으며 러시아는 오랜 시간이 흐른 [[18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북캅카스 지역에 다시 발을 내딛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