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프전쟁 (문단 편집) === 개전 === [[파일:랑손전투.jpg]] [[파일:박닌전투.jpg]] 이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복건함대가 전멸한지 3일 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해전은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육전에선 의외로 청군이 분전했지만 유리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통킹을 둘러싼 크고 작은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교환비는 1 : 10을 넘겼다. 다만 압도적인 인명피해에도 어떻게든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아 프랑스군 지휘관마저 역관광시키고 교착상태를 만든 점에선 청군의 전술적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프랑스군은 베트남 전선에서 우월한 교환비를 내면서 청군을 얕보고 지나치게 북상했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원군으로 온 풍자재는 당시 청군에 몇 없는 용장이었다. 풍자재의 지휘하에 청군은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돌격했고, 그 결과 프랑스군은 진남관(鎭南關)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나마 이후 벌어진 키루아(Ky Lua) 전투에선 일단 량선(Lang-Son) 지역 탈환을 목표로 한 청군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고 피해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프랑스군은 심각한 아노미 상태에 빠지며 물자까지 다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고 본토에 패전 가능성이 있다는 전보를 보내, 이 여파로 쥘 페리 총리(Jules François Camille Ferry)는 불신임안을 받고 내각까지 총사퇴를 하게 된다.[* 키루아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네그리에 장군을 대신해 프랑스군 지휘권을 받은 에그리제는 청군이 랑선을 포위해 보급로를 끊을 준비를 했다고 판단하고 퇴각결정을 내렸다.] 비록 청군은 교환비에서 압도적으로 피해를 많이 봤고 전황에서 확실하게 유리하다고는 볼 수 없던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전투 경과로는 협정에서 프랑스가 많은 양보를 해야 할 수도 있었으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