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풍군(1890) (문단 편집) == 여담 == * [[성격]]이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관련 일화가 하나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괴산]]에서 작가 [[홍명희]][* 소설 《[[임꺽정]]》을 썼다.]와 함께 [[3·1운동|3·1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이재성(1887 ~ 1925)이란 사람이 있었다. [[항렬]]로는 이해승의 [[할아버지]] 뻘 먼 [[친척]]으로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했었는데, [[징역]] 1년 반을 살다 나온 후 집세낼 돈이 없어 [[손자]] 뻘인 이해승이 소유한 [[누동궁]]의 10여 호 별채 중 한 채를 빌려 들어가 살았다. 당시 이재성의 [[부인]]은 [[임신]] 중이었는데 이해승의 집에서는 [[직계]]가 아니면 궁에서 아이를 낳거나 죽을 수 없다며 나가라고 재촉했다. 이재성의 부인은 다행히 지인들의 도움으로 [[흥인지문|동대문]] 부인 병원에서 출산했으나 불행히도 아기는 죽었다. 쇠약해진 이재성의 부인은 누동궁으로 돌아갔으나 이해승에게 쫓겨났고 이틀만에 [[사망|죽었다]]. 이재성 역시 [[폐결핵]]이 심해져 드러누웠으나 이해승은 집에서 죽을까봐 두려워 [[무당]]을 불러 [[점#s-2|점]]을 치고는 그 날 바로 내쫓았다. 이재성은 쫓겨날 때 [[겨울|한겨울]] [[바람|찬바람]]을 쏘인 탓에 [[질병|병세]]가 나빠져 부인과 마찬가지로 쫓겨난 지 이틀 만에 [[객사|사망했다]]. 이재성이 죽은 후에도 이해승은 물론이고, 집안 사람 어느 누구도 [[조문]]을 가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이재성의 친구와 지인들이 이해승에게 따지러 갔다. 그러나 이해승은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고, 끝내 무대응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이는 1925년 2월 8일 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실린 내용으로[[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5020800209202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5-02-08&officeId=00020&pageNo=2&printNo=1625&publishType=00020|#]][[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5020800239102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5-02-08&officeId=00023&pageNo=2&printNo=1613&publishType=00010|#]] 이해승의 인물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비록 먼 친척이지만 자신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죽어가는 사람을 내쫓을 정도의 비열함을 보인 것이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1012212315#csidxb8d99e23aa678a7ab6285d084ae4e4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