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진시 (문단 편집) ===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 [include(틀:일제강점기의 부)] 원래는 [[부령군]] 관할의 작은 어촌이었지만 [[1908년]]([[융희]] 2)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 오히려 [[성진시|성진]](1899년)보다도 개항이 늦었다. 정작 이 이후부터는 성진보다 청진이 더 대도시로 성장하게 되었지만… ~~[[하코다테시|하코다테]]와 [[삿포로시|삿포로]]의 관계와 비슷하다~~] 시가지가 형성되고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1910년]] 부령군 전체가 청진부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청진부의 영역을 개항장 일대로 축소시키고, 나머지 면 지역을 다시 부령군으로 분리시켰다. 원래는 동쪽 고말(高抹)반도에서 도시가 발달하여, 점차 서쪽 수성평야로 도시가 확장되는 양상을 띄었다. 그러다가 [[1940년]] 3월에 [[함경북도]]의 도청과 구 [[청진공항]]이 있던 [[경성군]](鏡城郡) 나남읍[* 원래 경성면에 있던 도청을 1920년에 나남으로 옮겼었다.], 용성면 대부분 및 [[부령군]] 청암면 일부를 편입하여 청진시는 '''함북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면적이 275km^^2^^[* 당시 [[평양시|평양]]의 면적과 맞먹었다. 당시 평양시의 인구는 '''41만.''']로 늘어났고, 인구 규모면에서도 1945년 당시 '''23만 5천명'''으로 인구 면에서 전국 5대 도시[* 인구 순으로 경성-평양-부산-대구-청진-흥남-신의주-원산 순으로 꼽혔다. 즉, [[대구광역시|대구]]와 맞먹을 정도였다.]로 발돋움하였다. [[함경북도]]의 해안선 중앙에 위치하여 [[전쟁]]에서의 주요 목표가 된 일이 많다. [[태평양 전쟁]] 말기 [[만주 작전]]에서 [[소련]]이 부수적으로 함경북도에 군대를 보내어 [[청진 상륙 작전]]을 펼쳐 점령하였다. 전투 자체는 종전이 되고도 하루가 더 지난 16일까지 지속되었으나 어쨋든 [[광복]] 전까지 [[소련군]]이 당도한 최남단 지역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