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청일전쟁 (문단 편집) === 조선에 미친 영향 === [[파일:external/www.futurekorea.co.kr/29174_20153_1158.jpg]] 조선을 밟고 있는 일본군과 청군 그리고 지켜보고 있는 러시아 >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해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외국인들은 자국의 공관으로, 조선인들은 시골로 피란을 떠났다. 부모들이 버렸거나 인파 속에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애들이 숱하게 보였다. 전쟁이 무자비하게 휩쓸고 지나간 평안에는 길이가 수 마일에 넓이가 몇 야드나 되는 만주군 기병대와 말의 송장더미가 전쟁이 끝나고도 3주가 넘도록 그로 방치돼 도시를 오염시켰다. > ---- > -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상투 튼 사람들과 함께한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https://www.google.co.kr/amp/s/m.mk.co.kr/news/culture/view-amp/2017/05/356753/|#]] > 6월 10일 일본 혼성여단이 인천으로 상륙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청국상인이 6월 중순 귀국길에 오르기 시작했고, 불안을 느낀 조선인들이 앞다퉈 각 지방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인천영사관 보고서) > > 일본군이 서울 성내에서 행군하고 있던 6월 23일경부터 이고 지고 하여 난을 피하는 사람이 길을 잇고 부유한 집안 또는 귀인의 가족들은 이미 8, 9할까지 시골로 달아났다.(일본 신문 기사) > > 7월 5일 일본의 인천주재 병참감의 비밀보고에 의하면, 일본 혼성여단의 병참업무가 극히 어려움에 처하였으며 일본군의 사역을 기피하는 조선 인부를 전쟁터에서 필히 사용하기 위해서, 즉 후일 탄환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 조선 인부를사역시키기 위해 한두 명을 고의적으로 죽여서 수십 명을 공포에 몰아넣는 방법을 써서 인부를 확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 > 7월 14일, 강경․황산 주변의 주민들은 큰 길에 나왔다가 통행하는 관군이나 청나라 병사 또는 관리 등에게 잡혀 졸지에 사역될까 두려워 누구도 전주 이남엔 가지 않으며(……)군대ㆍ관리들이 모내기에 종사하는 농민들을 잡아다가 사역시키므로 농민들은 모두 두려워서 도피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수의 일병,청병이 함께 옴으로써 향후 어떠한 형세에 이르게 될지 알 수 없으며 경성주민 같은 경우 10중 8, 9는 충청ㆍ전라 지방으로 피난 가겠다고 하여 인심이 흉흉하며(……)(일본무역상의탐문보고서) > > 7월 23일의 소위 ‘경복궁점령사변’으로 경성의 성 안 거주민의 6~7할이 피난하였다.(주한 일본 외교관의 자서전) > > 7월 23일을 맞이하자 하늘에 울려 퍼지는 포성에 잠을 깬 한인 수만명은 일시에 당황하여 도망 다닌다. 토민이 도망가는 참상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상태다.(일본 신문 기사) > > 7월 23일:조선 선박이 평안도로부터 (황해도로) 오는 것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들어보니 이들 모두 의주지방에 청병이 거의 5만 명이나 온다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가재도구는 약탈당하고 부녀자들은 욕을 당할 것이라 하여 피해오는 자를 태워 주었다.(일본인 선장의 보고) > > 7월 25일:지난 6월 초순 아군이 입경한 이후 이곳에 거주하는 조선인에게 매우 큰 놀라움과 동요를 주어 시민의 7, 8할은 성 밖으로 도망가서 장사가 안 되고 영세민은 호구책이 막연하여 얼마간 참상을 띠고 있다.(일본공사가 본국으로 보낸 보고) > > 8월 초순, 일본 군대가 처음 원산으로 상륙하자, 韓商은 처자를 데리고 멀리 내지로 피난한 자가 많다. 원산진은 거의 빈집이다.(원산 영사관의 보고) > > 8월 초순경31):일본이 군사행동을 함과 동시에 원산에 군대를 상륙시키자 조선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봉산마을에 사는 약 1만 명의 주민들은 자기 집을 버리고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러시아장교의 여행기) > > 8월 5일: 畿營,交河에 주둔한 일본 군인들이 촌락으로 출몰하여 부녀와 가축을 겁탈하고 약탈하므로 모든 인민들이 도망가 숨었음을 총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첩보하여 오다.(총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 > > 8월 12일:어제 오후 原州지방에서 온 은 군복 또는 복장을 하고 무기까지 갖고 있었는데 의 민가에서 식품을 탈취하여 오늘 새벽 지방을 향하여 출발했다고 한다.(……)이 때문에 춘천주민은 일시 동요하여 피난간 자가 많다.(춘천전보국에서 일본공사관으로 보낸 춘천 상황보고) > > 8월 15일:청병이 육로로 도착할 예정인데(……)(평양감사 민병석은) 그 병력에 공급할 쌀과 우마를 징수하여 속히 송부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에 안주현감이 명령에 응하여 징집에 착수하였는데, 백성들이 모두 불평을 호소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자 도망하는 자가 많았습니다.(일본의 원산주재 영사가 경성의 일본공사에게 보고) > > 8월 16일 전후 상황:청군의 역부는 식량이 없어서 이곳(평양) 부근의 촌락에 와서 소ㆍ돼지 같은 것을 강탈하여 기아를 면하거나(……)이는 거의 백주의 강도로, 지방민의 곤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방민은 점차 도피하는 사람이 많아져 평양 안에 거주하는 사람은 겨우 3분의 1 정도입니다.(원산주재 영사가 고용한 韓語敎師가 평양을 정찰하고 제출한 偵察記) > > 8월 20일경:(청의 아산 패잔병이) 가는 곳마다 악행이 무변하야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고 젊은 부녀들을 마음대로 능욕․강간하며 길가에 있는 개, 닭과 소와 말은 있는 대로 다 잡아먹고 끌어가며, 골골마다 우리나라 관가에서 인민을 강제로 징발하야 짐도 지우고 교군(가마)도 메게 하는데(……)(당시 9세였던 목격자의 회고 글) > > 8월 20일경:(일본)이 멀리 북진하는 길, 거리의 인민은 모두 마음을 적(청군을 일컬음:필자)에게 의지하고 도망가 숨어서 사역에 응하지 않는다. 때때로 남아 있는 자는 적을 위해서 정찰을 하는 것이다. 瑞興府使洪鐘淵이 하는 바가 이와 같다.(종군기자의 기사) > > 8월 29일:앞서 경상도 宣撫使李重夏가 嶺南沿路의 일본 遊兵이 마을로 난입하여 작폐하는 일이 자못 많아 민정이 더욱 소요하다고 외무아문으로 알려오다. 이날 외무대신 김윤식이 일본 특명전권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에게 공함을 보내어 유병들에 대한 沿路滋弊禁止告示文을 만들어 보내줄 것을 요청하다.(총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 > > 9월 2일, (일본의) 원산 지대가 양덕에 도착했을 때, 양덕부의 서쪽지역 인민은 모두 일본의 조선침략을 반대하여 일본군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도망하였으며 부사나 현관 역시 한 명도 남은 자 없었으며 관청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종군기자의 기사) > > 병참부의 추송에 있어서, 원산에서 양덕까지는 줄곧 조선 인부를 이용하였고, 여기서 성천까지는 때로는 조선인 때로는 태우를 이용하였다. 성천에서 평양까지는 조선 인부가 모두 도망가서 어쩔 수 없이 얼마 안되는 일본 인부와 태우로써 운반하였다.(종군기자의 기사) > > 9월 3일 개성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청석관의 성문을 거쳐 청석진을 나오니 연도의 가옥 모두 비어있다. 인민은 난을 피해 재령 지방으로 갔다고 한다. (전쟁견문록) > > 9월 15일 이전:일본군이 경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 연도의 군읍은 이미 청군에 의해 모두 약탈당했고, 주민은 사방으로 도망가 숨어버려 밥 한 그릇 물 한 잔 구할 곳이 없다.(뉴욕헤럴드 종군기자의 기사) > > 평양전투 직전 평양 상황:원래 전쟁이 나면 전투지의 주민이 두려워 다른 지방으로 피난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이번처럼 연도의 주민이 일제히 피난가는 것은 드문 현상이다.(종군기자의 기사) > ---- >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314329|청일전쟁 당시 조선 전쟁터의 실상]] 6월 중순부터 일본이 점령한 인천과 서울을 시작으로 피란민이 발생하였고 경복궁 점령 이후 6~8할의 서울 주민이 피란하였다. 평안도에서는 청군의 남하로 많은 평양도민이 황해도로 피란하였다. 청일 양군은 군량 보급없이 현지 조달로 이뤄져 경기, 충청, 평양에서 쌀과 목재 등 생필품의 가격이 7~9월 간 2배에서 5배로 폭등하였고, 9월부터는 석유를 포함해 생필품의 거래가 끊겼다. 8월부터는 성환에서 패배해 북상하는 청군과 원산에 상륙한 일본군의 약탈이 자행되었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314329|#]] 특히 양군의 물자약탈과 노동 징발로 평양주민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후 평안도 경제가 파탄나고 세입이 전혀 되지 않아 극심한 재정난을 초래한다. 일본에 반기를 든 2차 동학농민운동은 일본 지휘하의 조선 관군들이 소탕하였는데, 여기서는 삼남 지방의 세입 체제가 붕괴된다. 이 때 벌어진 재정난은 대한제국 초창기까지 지속될 정도로 수년동안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은 1년 뒤인 1895년 러시아와 연대하는 [[을미사변|명성황후를 살해]]한 뒤 물러났던 친일내각을 재집권시켰고 이후 [[고종]]은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한다. 이렇게 러시아와 일본이 대립한 가운데 1897년 [[대한제국]]이 건국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