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청일전쟁 (문단 편집) === 영향 === [[파일:JapanPunch29September1894.jpg|width=70%]] 영국의 주간 잡지 '펀치'에 실린 청일전쟁 풍자화. 근대화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일본이 거대한 청 제국을 이겼다는 사실은 서구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하였다는 징후로 받아들였고 열강으로 진입하면서 5년 후 [[의화단 운동]]에 개입하였다. 정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본격적으로 팽창주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돈 사고방식도 이때 정립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삼국간섭]]을 벌인 러시아와 서구 열강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러시아도 [[부동항]]을 얻기 위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면서 훗날 [[러일전쟁]]이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청은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양무운동]]에 대한 회의론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단지 서구의 기술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일본의 유신처럼 체제 자체를 뒤엎자는 [[변법자강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변법자강운동의 경험이 나중에 [[신해혁명]]으로 어느 정도 결실을 얻으니, 사실상 청을 멸망으로 몰고 간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아편전쟁]] 등 서양 세력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배하던 것에 재수없게 지나가던 미친 개에게 물린 일 정도로 여기던 [[중국인]]들에게 청일전쟁은 큰 충격이었다. 자기네 문화권에서 별 볼일 없었던 변방의 [[섬나라]], 한낱 오랑캐로 생각했던 야마토 민족에게 어처구니없이 털리고 앞마당 조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자, 비로소 중국이 [[중화사상|천하의 중심]]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한민족 국가는 중원 왕조들에게 상징성이 매우 컸다. 고조선 ~ 삼국 시대에 투닥거릴 때부터 동북방의 안보와 직접 연계되었고, 통일 신라 이후 조공 체제가 확립되고 중원의 중심이 동쪽 해안가로 옮겨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앞마당으로 인식되었다. 만리장성의 개축과 한나라 이후 지속적인 토벌로 서북방 지역의 유목민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반대 급부로 만주 일대의 유목민들이 중원을 가장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고, 이 지역을 중원 왕조들이 평정하려면 한민족 국가의 협조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서양한테 지고있는 상황에서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정신승리했었다. 수도까지 점령 당하고 궁전이 불탔는데 이 무슨 정신승리냐 하겠지만 사실 중국 역사에 보면 타국에게 힘의 우위에 있지 못할 경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서 시간을 버는 대신, 중국이 가진 막대한 인구와 농업 생산력, 문화력이라는 사기적인 역량을 발휘해 장기적으로 재탈환하는 경향이 있다. 초기 한나라나 송나라는 주변국에게 세폐를 바치더라도 이것을 크게 자존심 상해한다기 보다는(그러나 사료를 보면 속마음은 엄청나게 자존심 상해했다.) 하나의 전략으로 생각하고 꺼릴 게 없어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중국은 유목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때로는 나라가 통째로 점령당했지만 결국에는 압도적인 인구수를 바탕으로 소수 지배계층인 유목 민족들을 동화시켜나갔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거쳐 산업 혁명까지 도달한 서구의 문명수준은 어마어마 했기 때문에 과거 유목민과 달리 이번에는 오히려 중국이 [[양무운동]]으로 서양 문명을 배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양무운동 자체는 끝내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대에는 분명히 어느정도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청의 수뇌부는 여전히 이런 시대의 변화를 읽는 눈이 어두웠기에 야쿱 칸과의 전쟁을 유리하거나 비등하게 이끌고도 [[러시아 제국]]에게 중앙아시아 일대의 영토를 상당 수 내주고 [[청불전쟁]]에서도 전황을 자신들 쪽으로 어느 정도 이끌고도 [[프랑스 제3공화국]]만 좋은 조약만 맺고 끝낸 한심한 지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는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이전과는 달리 제대로 된 전투력을 보이지 못하고 패전하는 추태로 이어졌다. 청일전쟁 이전에는 청나라의 군사력을 얕보지 않으려던[* [[야쿱 벡]]에 의한 위구르의 봉기를 최신 무기를 동원하여 신속하게 진압한 것이나, [[청프전쟁]]에서 의외로 프랑스에게 큰 타격을 입혔던 사례 등에서, 양무운동은 외견상 청나라의 군사적 근대화를 꽤 완수시킨 듯이 보였다.] 열강들은 전쟁 이후 대놓고 청나라를 무시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열강들의 청 침탈이 가속화되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는 1898년 동맹을 빌미로 만주 지역의 철도 부설권 및 [[뤼순]]을 조차했으며, 독일은 1897년 선교사 2명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빌미로 자오저우만을 조차했다. 이외에도 프랑스는 1899년 광저우만을 조차했으며, 영국과 미국, 일본도 이권 획득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1898년 변법 자강 운동의 실패와 1899년 [[의화단 운동]]으로 외세의 열강들이 [[아편전쟁]] 때보다 더 확실하게 [[중국 대륙]]을 짓밟아버리자, 중국 지식인들은 그제야 비로소 일본을 모델로 한 입헌군주제 개혁이 아닌,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하는 혁명 운동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덕분에 조선을 [[일제강점기|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고 훗날 [[만주국]]을 세워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기까지 했으므로, 중국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청나라 멸망의 원인 정도로 끝나지 않고 일본의 중국 본토 침공까지 가능하게 만들어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나는 원인까지 제공한[* 아이러니하게도 중화민국이 세워진 원인들 중 하나도 청일전쟁이다. 어찌 보면 중화민국은 일본과의 전쟁(청일전쟁)이 원인이 되어 세워지고 일본과의 전쟁(중일전쟁)이 원인이 되어 대만으로 쫓겨난 아이러니한 국가인 셈이다.] 엄청난 부정적 [[나비 효과]]인 셈이다.[* 이런 영향은 현대까지 유지중인데 동아시아에서 절대적 패권질서였던 중화가 붕괴된 이후 21세기 초입에 와서야 중국이 겨우 중화의 부활을 외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물리적 힘은 다시 찾았을지언정 그걸 뒷받침해줄 [[문화대혁명/악영향|소프트파워의 부재로]] 주변국의 경계심만 잔뜩 사게 되어 사실상 포위되어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