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일전쟁 (문단 편집) == 정전 협정 == 청나라는 상군을 투입하였으나 전세는 기울어 상군도 패했고 결국 주화파 [[공친왕]] 혁흔이 총리가 되면서 화친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화친을 맺기 위해 호부 시랑 장음환과 호남 순무 소우렴을 [[히로시마]]에 파견한다. 그러나 장음환은 청나라의 전권 대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무츠 무네미츠]]는 거부하였고 혁흔이나 이홍장이 직접 와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 동안에 일본은 대만과 팽호 열도까지 점령하며 청나라의 목을 더욱 조여들었고 더 나아가 수도 [[베이징]]을 위협했다. [[파일:external/www.tonyhuang39.com/20080123_03.jpg]] 마침내 3월 30일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서 [[시모노세키 조약|정전 회담]]이 벌어졌다. 이때 일본은 아래의 사항을 요구하였다. * 타구(大沽), [[톈진]], [[산해관]]의 성지와 보루는 모두 일본군이 점령하고 청군의 군수품 일체는 일본군이 관리한다. * 톈진, 산해관간의 철도는 일본군이 관리한다. * 정전 기간 내의 일본 군비는 청국 측이 부담한다. * 정전 일시 및 양군의 경계선 등 세부 사항은 중국이 전기 3항에 동의했을 때 다시 논의한다. 얼핏 살펴만 봐도 막대한 전비 배상은 물론이거니와 청나라의 수도 코앞에 진지를 구축하겠다는 심산까지 나타났으므로 이홍장은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가혹! 가혹!"이라는 말을 연발하였다. 몇 차례 회담이 벌어지던 중 이홍장이 고야마 도요타로(小山豊太郎, 1869 ~1947)라는 [[일본인]]에게 저격당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진다.[* 고야마는 암살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고 1907년 2월 11일에 황실전범증보제정에 의한 은사를 받아 가석방 되었고 일본이 패전할 때 까지 살아있다 1947년 사망하였다.] 이에 일본은 이홍장에게 사죄하며 무조건 정전하겠다며 태도를 바꾼다. 이홍장은 참의 이경방을 대리로 내세워 회담을 이어갔고 1895년 3월 30일에 먼저 6개 조항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후 휴전 기간 동안 강화 협상을 진행하여 4월 17일 전문(全文) 11개 조항의 강화 조약, 각 3조항의 의정서(議政書) 및 별약(別約), 2조항의 추가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이 바로 [[시모노세키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하던 입장을 포기하고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했다. (결국엔 조선의 자력으로는 자주국이 되지 못했다.) 또한 [[요동 반도]], [[대만]]과 그 부속 도서, [[펑후현|펑후 제도]]를 [[할양]]하였고 고평은 2억 냥을 7년 이내에 배상하기로 했다. 이를 당시 일본 화폐로 환산하면 3억 6천만 엔으로 [[일본 정부]] 4년치 세입이다. 또한 일본은 서구 열강과 같은 [[최혜국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러시아의 재무 장관 비테는 일본이 요동 반도를 점령하는 것은 러시아의 이익에 해를 끼치며 [[극동]]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독일 제국]]과 연합하여 일본에 [[삼국간섭]]을 벌이며 압력을 가했다. 당황한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반응이 없자 결국 압력에 굴복하고 만다. 그래도 요동 반도를 돌려주는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하이난성|하이난]]도 할양을 요구하려다 너무 멀어서 대신 은 3천만 냥을 추가로 뜯어냈다. 그리고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요동 반도 반환에 대한 대가로 각종 이권을 차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