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일전쟁 (문단 편집) ==== 요동 전투 ====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제1군은 [[의주군|의주]],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어 [[단둥]]으로 진격해 [[요동 반도]]에 교두보를 구축했고, 이는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 노토 부락을 친 이래 두 번째 일본의 대륙 침공이었다. 오야마 이와오의 제2군은 화위안커우에 상륙하여 진저우, [[다롄]]을 공격했고, 다시 여순([[뤼순]])을 점령했다. 뒤이어 개평과 잉커우까지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요동 반도는 완전히 제압당했다. 다롄과 뤼순에서 청군의 활동은 졸전에 가까웠다. 청은 보하이만 통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두 항구를 오랜 시간에 걸쳐 근대적으로 요새화했지만, 청군 지휘관들은 북양함대가 웨이하이웨이에 틀어박혀 해상 보급을 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쉽게 두 요새를 내주고 퇴각했다. 그나마 뤼순에선 후퇴하지 못한 병력 1만이 항전했으나 하루만에 함락되었다. 이때 일본군은 청군에게 포로로 잡힌 일본군들이 처형되고 시신까지 처참하게 훼손된 것을 발견하고[* 과거 중국에는 처형된 사람의 시신의 일부를 소유하고자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에 격양된 일본군은 뤼순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고, 이때 일본군이 벌인 학살로 뤼순에선 군인과 시민 20,000여 명이 죽고 단지 40명만이 살아남았다고 영국의 [[타임즈]]지가 보도했다. 일본군은 순탄하게 요동 반도 전체를 접수했다고 선전했지만, 실은 다롄·뤼순 및 압록강 근처의 안둥·펑청을 장악한 후부터는 요동 내륙에서의 살인적인 추위와 청군 게릴라들의 역습으로 상당히 피해를 입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청군을 상대로 일방적인 교환비를 기록했다고 선전했지만, 실은 병사자 수가 비정상적으로 높다. 대부분 이러한 겨울철의 무리한 진공으로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로, 파병된 일본군은 '짚신' 을 신고 있었는데 요동의 추위에서 동상자가 대량 발생했다 한다.(일본의 산업화는 아직 미비했고, 제대로 된 가죽 군화를 신겨주는 건 러일전쟁기에나 가능했다)전략적 이득도 걸려있지 않던 요동 내륙으로의 무리한 겨울철 진군을 주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폐렴을 명목으로 1군 사령관 직을 사임하고 귀국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